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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푸는사람 Jul 09. 2022

[스타트업 경험기] 9편) 스타트업을 선택했던 이유

앞서, 스타트업의 많은 에피소드와 이벤트를 다뤘지만 모든 스타트업이 이렇진 않다.

일로 만난 사이지만 절친이 되버린 친구도 현재 스타트업의 대표이기도 해서 가끔 나는 잡ooo에서 후기를 훔쳐보곤 했는데 그 친구는 잘 해나가고 있는것 같았다. 본인도 한때는 직원이었었고 달라진 역할이 익숙치 않다며 역지사지를 해보려고 나에게 가끔 던지는 질문도 꽤나 진지하고 건설적이었다. 놀려먹을게 없어

나도 희망편을 기대했기에 실망이 큰 것뿐 스타트업은 당당하게 시행착오를 겪기 위해 가는곳은 맞다.

기대했던 시행착오는 일에 관한것이었지 사내정치나 인간관계가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을 피할 방법도, 헤쳐나갈 묘수도 없었기에 내 선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했었다.

비관적인 이 상황이 내 감정때문인건지, 감정에 의한 편향된 생각이었는지 점검하는 시간도 가졌다.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들과 분노의 감정에 매몰되었던 나도 개인의 욕망을 내려놓고나니 분노도 점점 사그러들었다. 

내가 그들보다 좀 더 빠르게 담담해질수 있었던건 감정에 매몰되는것도 체력과 모종의 정이 있어야 가능한거다.

나는 그들만큼 젊지도 않았고 타인에 대한 기대도 크지 않았다. 

그들은 한때라도 따뜻한 대우를 받았을지 몰라도 나에겐 그렇지도 않았다.

실망스러운 경험이 새삼스러울건 없었다. 

회사는 그래봤자 회사. 그안에서 나도 누군가를 실망시켰을거다.

나도 한때는 그들처럼 치기어리고, 내 얘기 좀 들어줬으면 좋겠고 내 생각이 옳다고 믿었다.

20대 때의 나는 더했던것 같다. 사장한테 서류를 집어던진적도 있었다. 

그 사장이 나를 왜 해고하지 않았는지는 아직도 모를일



모난 돌이었던 나도 깎이고 깎여 좀 더 둥글 둥글해졌을뿐



상황에서 한 발짝만 떨어져도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창가에 기대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 바깥 세상만 보이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 창문의 크기와 실내의 풍경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왜 스타트업을 선택했는지 인과과정을 되풀이 해봤다.



지난 10년간을 돌아보면 일과 야근에 매몰된 기억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피똥쌌던 기억이 많다.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에게 알리거나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다. 

전공과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전공을 공부했는데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스스로 원해서였다.

왜 그랬냐는 질문을 할거고 그들이 이해할만 대답을 하기가 귀찮았다.

오로지 단순한 재미로 시작된거였다.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있는 분야라 관련서적을 읽다보니 더 궁금하고 더 알고 싶고 더 근본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만족할만큼 관련 지식을 찾는것도 쉽지 않았고 교양수준의 서적은 갈증을 더 키울뿐이었다.  

결국은 학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극도의 효율충인 나에겐 큰 용기가 필요했더랬다.

두 번째 학사를 취득하고 석사를 진행하면서도 이렇게 돈을 쏟아부을 일인가 싶었지만 다행히 지도교수님의 도움도 받고 예상보다는 덜 배고프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때 차라리 코인투자를 했더라면?


한동안 나는 직장생활에 환멸이 나있었는데 좋은 회사와 대표이사를 만난적도 있었다.

학업때문에 퇴사의사를 밝혔지만 그분은 반일 근무 형태로 근무할 수 있게끔 배려를 해주셨고

나는 사원도 아니었기에 이것이 대표이사의 입장에서 쉬운 결정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일했다.

그것도 논문이 겹칠때쯤엔 더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퇴사를 하면서도 미안하고 감사했던 유일한 기억이다.

이 회사의 대표이사님은 나의 멘토이기도 했고 이분을 통해 경영자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되었다.

배울점이 많은 분이었고 주변에는 좋은 분들도 많았다. 인복은 안목과 두둑한 인심에서 오는거 맞더라.


직장생활을 도저히 할 수 없어서 프리랜서로 일했다. 사실 프리랜서로 일할 때 제일 만족도가 높다.

나만 잘하면 되고 책임질 사람도 없으니 마음도 가볍도 피곤할 일도 없었다. 덕분에 학업 집중도는 높았다.

커리어를 놓고 보면 첫번째 전공만으로도 큰 불편함은 없었다. 

요즘은 라떼보다는 학벌이나 스펙을 따지긴 하는것 같지만 나의 첫번째 전공분야에서는 큰 의미가 없어서인지 남일 같을 뿐이다. 내 전공분야는 학벌과 실력이 별개였고 학력과 상관없이 본인 실력에 따라 최저시급부터 억대 연봉도 가능한 분야긴 하다. 그만큼 이 업종에서 살아남는것 자체가 하드코어하고 끊임없는 자기계발이 요구됐다. 그래서 두번째 전공을 시작하기로 마음 먹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이 두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을지 몇년간 고민했었다. 그런데 재밌으니까 하게 되더라.

할거면 망설이지 말고 좀 더 일찍 시작할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더 크다.

결과적으로 인생을 관통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고 이 수수께끼가 풀리면서 큰 해방감을 느꼈기때문이다.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나는 좀 더 공부하고 연구하고 싶은 분야지만 먹고 살기 바빠 그럴수 없는게 아쉽다. 

두번째 전공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을 비롯한 인생 전반에 더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일하는 분야는 머릿속의 이미지나 생각을 전달하는것이 어렵고 소통 능력이 매우 중요했는데 왜 그런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원인이 무엇인지, 근거가 무엇인지 전달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내재된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고 더욱 빛나게 해줬다.

덕분에 나는 진행했던 프로젝트들도 좋은 평가를 받았고 동료들의 신뢰도 두텁게 챙겼었다.


성공적인 경험을 한다고 해서 다 좋은것만은 아니었다. 

잘 해결해나가는것이 지속되고 당연하게 흘러가니 편안함이 지속되다 재미가 없어졌다.


대부분의 회사들은 잘 돌아갈때는 리더급의 T.O가 나오지 않는다.

문제가 심각하거나 망하는 프로젝트에서 리더가 도망나거나 짤린 경우 T.O가 생긴다.

사업확장등의 희소식으로 생기는 T.O는 대부분 지인루트로 채우기 때문에 중견급 이상의 T.O가 났다면 각오하고 가는편이 좋다. 나도 이직할때마다 대부분 전자쪽이었던것 같다. 

처음엔 대표이사, 혹은 그에 준하는 경영진들은 내가 기적처럼 수행해낸 프로젝트들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나라를 구했다는 말까지도 했었다. 그 후로도 나는 많은 프로젝트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그들은 이내 무감각해졌다. 


100을 달성해도 대단한것이었는데

다음엔 110을 요구했다. 

120을 달성하면 당연하고 130을 요구했다.

100을 달성한 사람이 100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200의 힘이 필요하다는건 몰랐다.

나의 업계선배들이 더 잘할 수 있지만 왜 더 잘하지 않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성과평가를 3년 연속 S로 달성했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건강을 잃었다. 

나는 건강이 그렇게 소중한건줄 몰랐다. 소중한걸 잃고나서야 깨달았다.

잃는건 순식간이지만 회복하는 느렸다.


그들은 잘하고 있는 나에게 점 점 더 많은 역할을 요구했다. 

나중에는 영업 전선에 세우려는 회유도 있었고 몇번은 못이기는 척 들어주기도 했었다.

클라이언트들은 내 말에 제법 잘 귀기울여줬고 1년 넘게 계약서에 날인이 안되던 프로젝트도 나를 동반하면 계약이 되곤 했었다. 

내가 몰라던 특출한 영업능력이 있던건 아니다. 

최소 억대의 돈이 오고가는 계약에서 수행사가 계약을 이행할 수 있는지 그들입장에서는 당연히 중요하다. 영업자들은 요구를 이해하던 말던 무조건 된다고 한다. 클라이언트들도 이런 점을 익숙히 알고 있었다. 

나도 클라이언트사에서 수행사를 선정했던 경험이 있기에 이들이 망설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금액이 합리적인지, 수행 책임자가 어느정도 역량인지, 원하는걸 이해했는지, 실제 투입 인력이 있는지 불안하니 계약을 안하는것 뿐이었을거다. 

가려운 부분들만 잘 긁어주면 됐다. 

수행 책임자가 정말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들이 더 빨리 파악했다.

경험이 쌓일수록 일은 편해졌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손발이 잘 맞춰지니 일은 더 잘 돌아갔다. 

오히려 내부의 적과 싸우는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사내정치란 어디에나 있으므로 제외하더라도 나는 이 회사에서 하는 일이 점점 더 재미없어졌다.

이 회사에서 해보고 싶었던 프로젝트, 업계 현황, 코스트까지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나니 더 이상의 목표가 생기질 않았다. 내가 수행했던 프로젝트의 결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클라이언트사들은 이런 저런 오퍼를 보내왔다. 나름 임원급이라 쉽게 오퍼하다가 새어나가면 거래처와 틀어질수도 있어서인지 한참 뜸을 들이다 제안을 했고 한 두번의 거절을 예상했는지 거래처와 서로 맘상하지 않을만한 이직 시나리오와 계획까지 그들은 준비했었다. 그런데도 영 땡기지가 않았다. 

이 업종의 회사는 더이상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일이 힘들어도, 사내정치가 더러워도 퇴사를 생각하진 않았었는데

나는 이 지루함을 견디는게 힘들었다.

나는 생각보다 더 도전적인 사람이었다.

엉덩이가 근질거렸지만 '동료애'로 많은 시간들을 인내했다.

그 회사의 체계상 나의 부하 직원들이지만 나는 그들을 동료라 생각한다.

그들이 보이는 두터운 신뢰와 그들을 아끼는 나의 마음이 시너지를 이뤘고

싫은 영업에 나간것도 이들에 대한 월급이 걱정될만큼 각별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이 아닌데도 이들이 소중해진건 서로 신의가 있기에 가능했던것 같다.

직장에서 뭔 신의니 의리니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장기근속 하는 이유의 1위가 동료하고 한다.

그럼에도 내가 너무 너무 지루했다.

어쩌다 한번씩 이런 상황을 토로하면 업계의 친한 지인들은

농사 잘해놓고 수확량만 관리하면 되는데 왜 다시 개척민되려고 하냐고 말했다.


근데 내가 너무 지루했다. 이 조직의 성장한계가 눈에 보였기때문이다.

여기서 더 키우고 싶어도 회사의 영업능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유니콘 투자를 받아오면 내밀 사업계획서도 써놨지만 받아오질 못했다. 

프로젝트들이 규모가 작지 않음에도 나는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머릿속에 수많은 아이디어와 방법들이 있는데

새로운걸 할 수가 없으니 도무지 재밌지가 않았다.


나는 이를테면 교향악단의 지휘자와 비슷했다. 

소속된 악단의 클래식들만 지휘할 수 있었던거다.

더 다양한 곡을 다뤄보고 싶지만 다른 장르의 음악은 허용되지 않았다.

나에겐 서울대 음대생이 필요한게 아니라 실용음악을 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새로운 시도를 가볍게 해볼수도 없었다. 

나는 권한과 책임을 덜어내고 회사 내 사이드프로젝트를 하고 싶었지만 이런 일을 나눠줄 사람도 없었다.

책임의 무게를 알기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고독하고 지루했다.


그렇게 참을 수 없을만큼 지루할때, 어떤 사건이 생겼었다. 

그것도 결국은 사내정치였는데 나에겐 트리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좀 더 앞당기기로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 제안을 해온 스타트업에선 내가 관심있던 제품을 프로토수준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재밌어보였다. 이게 나에겐 아주 중요했다.

이 제품은 아주 아마추어틱하고 날것었지만 열정이 느껴졌고 나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프로페셔널한 손길을 거치면 틈새시장에 자리잡기에도 괜찮아 보였고 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제품을 필요로 하는 회사들도 연결해줄 수 있었다.

실상은 그럴듯한 모델하우스였다.

서로의 핏이 잘 맞을거라는건 나의 착각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것도 빙산의 일각일뿐,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줄은

그때 내가 프로토라고 생각했던것이 그들에겐 더없이 훌륭한 완제품이었고 

거기에서 무엇하나 바꾸는게 그렇게 힘들줄은

지금은 정말 많이 좋아지긴 했다. 내가 목에 핏대 세우고 싸우다시피 끌고갔었으니까

지금와서는 그게 그들이 바란건지는 잘 모르겠다.



인터뷰에서부터 이 젊은 스타트업의 대표이사는 꽤나 솔직한것처럼 현재 조직의 문제점을 털어놓았었다.

어떤 부분은 공감이 가기도 했고 나도 시행착오를 겪었기에 좋은 대안을 제시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회사소개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구구단을 외우는 아이처럼 상대가 듣던 말던 빠른 속도로 암기를 늘어놓듯이 진행했었다. 나는 그게 무성의하다고 느껴지기보다 그가 혼자 짊어졌을 사업 자금 확보의 무게로 느껴졌었다. 그리고 회사와 제품을 포장하는것에 아주 능숙했다. 

이건 분명히 칭찬할 점이지만 상대가 속았다고 느낄정도면 안하느니만 못한거 아닌가 싶다. 

이 젊은 대표이사는 R&R에 대해 굉장히 모호하게 얘기했는데 나는 콕 찍어서 요구하는 R&R 질문했었다. 


비유를 하자면,

이 젊은 대표이사는 지휘자와 연주자를 둘 다 원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그걸 다 하기를 원했다.

작은 회사의 흔한 래파토리다. 

단기간은 이게 가능해도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안해본것도 아니고

하지만 요즘의 세대를 비롯해서 나 역시도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다. 내 인생 소중해

퇴근 후의 삶이 없으면 돈벌어도 소용없더라. 

오해가 생기거나 애매하게 답변하면 안될 부분이니까 분명히 말해줬었다. 

나는 연주자 출신이고 작곡도 할수는 있지만 지금은 지휘자고 지휘자 역할을 훨씬 더 오래했고 잘한다 라고.

그리고 앞으로도 직접 연주를 할 마음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작곡이고 연주고 지휘고 순차적으로 가능하지만 전부 다 동시에 할 수는 없다고 했었다.

물론 그 대표이사도 동의했기에 적극적인 구애를 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얘기를 했음에도 동시에 3개의 역할을 하라는 요구는 계속되었었다.


회사생활을 지겹도록 했으니 꼬실때의 사탕발림과 가진 후의 간사함을 모르는건 아니다.

리스크도 어느정도 예상되었고 젊꼰 시집살이에 대해 경고도 들었도

그럼에도 스타트업을 선택했던건 


재미를 찾아서 온거다.

그런데 재미도 없었다. 

여기는 더 고독했다.

재미를 찾아보려고 노력은 했다.

충분히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엄격한 잣대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   여기까지가 내가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게됐던 이야기다. -








답답한 마음과 시작된 글쓰기가 삶의 한 조각을 기록하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밤을 쪼개서 쓰는 보잘것 없는 글이지만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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