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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안 Mar 17. 2023

뿌리

나무는 뿌리에서 시작된다


이따금 흐릿해지는 순간이 있다. 마치 풍선처럼 두둥실 떠올라 어딘가로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그럴 때마다 번번이 내가 날아가지 않도록 발목을 잡는 것들이 있었다. 온천천을 따라 운동하다가 문득 멈춰 서서 한참 바라본 오후의 햇빛이나, 별생각 없이 열어본 우편함 안에 들어있던 편지, 높은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본 서울의 야경, 망원동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가게에서 산 엽서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장면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

나를 뿌리내리고 자라게 한 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겨우 스물 남짓한 짧은 인생에 무슨 사건이 이렇게 많은지. 위태롭게 걸어가는 길마다 수없이 무너지던 순간들이 있었다. 길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벽이었고 벽을 마주한 순간 문이 보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정말 그랬다. 길은 있었다.

원래도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특히나 오늘처럼 먹구름이 잔뜩 낀 날이면 더 그렇다. 그럴 때면 걱정 없이 웃고 떠들었던 기억들을 꺼내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면 다시 일어날 힘이 생긴다. 그렇게 살아가는 중이다. 흐린 날에도 피어날 민들레를 생각하며.

먼 훗날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던데, 그렇다면 나는 기억을 남기고 싶다. 내가 아는, 그리고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었다고. 완벽하진 않았지만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항상 노력했고 그렇게 살다 갔다고. 책을 좋아했고 하얀 고양이가 있었고 다정한 사람들 곁에서 행복하게 지내다 갔다고. 아직 아득히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모두 끝났을 때 내가 누군가의 마음속에 그런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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