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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cemaker Nov 18. 2021

치과의 추억

외국의 한국 치과들


한국에 돌아온 이민자들이 우선적으로 처리할 일들 중에는, 치과치료가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한국을 제외한 나라에서는 의료비가 비쌀 뿐 아니라, 의료 수준도 낙후된 곳이 많기 때문이다. 팬더믹 덕에 한국에서 길게 체류하는 동안, 나도 당연히 치과 치료를 받았다.




    외쿡에서 한국 치과를 접한 경험이 많다. 생각보다 한인들은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고, 각국에 한의원을 비롯한 한국 의사들이 연 클리닉들이 꽤 분포되어 있다. 마취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던가, 금니만 보면 뽑아서 자기가 가져도 되냐고 묻는다는, 괴담처럼 전해지는 필리핀 의사들의 행태에 지레 겁을 먹고, 치통이 있으면 으레 한국 치과부터 찾는다. 나보다 충치가 많은 남편 때문에 필수적으로  한인 치과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


  결혼 초기에 남편의 치통이 심해서 급하게 마닐라 올티가스의 한인 치과를 찾은 적이 있다. 적어도 한주에 한 번씩 네 번은 치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가격이 만만치가 않았다. 마닐라에서 두 시간 떨어진 시골지역에 사는 터에, 차와 기사를 대절해 치과에 간다면, 일회당 적어도 플러스 백 달러의 부가 비용이 더 붙었다. 저가항공을 타고 한국에 와서 치료를 받는 편이 더 나아서, 급하게 한국행을 결정했다. 아주버님이 치과 의사 선생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겐 진료비를 거의 안 받으셔서, 차라리 비행기 값을 내는 편이 훨씬 저렴했다.




  결혼 전에, 키르기스스탄이라는 나라에서 일 년 동안 한국어 교사를 한 경험이 있다. 교회에서 단기선교사라는 이름으로 갔지만, 이슬람교가 주류인 나라였기 때문에, 선교보다는 한국어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더 많이 가졌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귀중한 경험이다.


  키르기스스탄은 원래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의료 기술의 수준이 매우 낮았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의사들조차 적은 월급을 받았다. (키르기스 만 그런지도 모른다.) 2009년 당시 의사들의 월급은 200달러 수준이었는데, 그래서 일과 후에 택시운전기사 등의 투잡을 뛰는 의사들이 많았다.


  그 나라는 주식이 고기라서, 한국인인 나로서는 제대로 된 영양을 섭취하기 어려웠다. 시장에 가면, 냉동고나 냉장고가 아닌 실온에 도살된 채로 손님을 기다리는, 내 기준에서는 무시무시한 고기 부위들이 많았다. 비위가 너무 상해서, 요리하는 것은 고사하고, 구매하는 것조차 꿈도 못 꿀 지경이었다. 물론 야채나 해산물도 구하기가 어려워 거의 영양실조에 가까운 상태로 지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잇몸에 커다란 염증이 생겼다. 생애 그런 통증은 처음이었다. 약도 구하지 못해 고통으로 끙끙거리던 차에 구원의 손길이 찾아와 주셨다.


  키르기스의 시골마을이었던 오쉬에도, 현지 치과 의사 선생님들을 재교육하는 목적으로 봉사하고 계시는 한국 치과 선생님이 계셨다. 바로 카낫 선생님이었다. 부인이신 촐폰 선생님은 장로회 목사님이셨다. 두 분은 적극적으로 포교할 수 없는 이슬람국인 키르기스스탄에서, 봉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하시는 선교사님이셨다.


   카낫 선생님께로부터 잇몸 염증 치료를 받았다. 십 년 이상이 지난 지금,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던 기억은 선명하다. 극심한 통증으로 인하여 잔뜩 겁을 먹고 갔는데, 치료하는 동안에도 치료한 후에도 통증이 하나도 없게 치료해 주셨다.




  남편과 나, 그리고 은찬이가 한국에서 치과 치료를 위해 택한 병원은 바로 카낫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사랑의 치과’ 다. 카낫과 촐폰 선생님은 몇 해 전 키르기스스탄에서 돌아오셔서 한국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키르기스에서 하시던 일을 멈추신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키르기스스탄의 외국인 근로자들이나, 한국어를 배우러 온 학생들을 여전히 도와주고 계신다.


   한국의 식재료 값이 키르기스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에 근로자들과 학생들은 주식인 고기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촐폰, 카낫 선생님은 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해주는 봉사를 하고 계시다.


  우리 가족이 카낫 선생님의 치료를 받기로 결정한 이유는, 하나도 아프지 않게 치료받았던 나의 경험 때문이다. 우리 세 가족은 모두 통증에 취약하여, 아프지 않은 것이 제일 중요하다.

 

   바로 지난주에 은찬이와 나의 치과치료를 모두 끝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카낫 선생님의 치료는 역시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남편은 더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전혀 겁을 먹은 기색은 없다. 촐폰과 카낫 선생님을 다시 만나, 덤으로 아프지 않은 치과 치료를 받았지만, 그 외에도 그분들의 삶을 본받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우리도 필리핀으로 돌아가, 누군가를 배불리 먹여줄 수 있는 가정이 되었으면. 기술은 없지만 혹시 마음의 통증이라도 치료해줄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먼저 걸어가신 분이 계시기에 충분히 따라갈  있기를 바란다.  분을 다시 만난 것은 비단 치과치료 때문만은 아닐 이라고 지레 짐작해 본다. 각박한 세상에서 믿을만한 치과 의사 선생님을 아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다. 치과 치료를 받는 핑계로라도  분의 삶을 자주 엿볼  있음이, 그래서 본받을  있음이, 가장 커다란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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