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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cemaker Dec 07. 2023

외할머니

  요즘 자꾸 나의 할머니가 생각난다. 아들이 우리 엄마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외할머니를 좋아했었다. 아들이 우리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해서 그런가. 나도 외할머니가 그립다.


   우리 할머니의 성함은 ‘김현진’으로 엄마나 이모들보다 더 예쁘고 세련된 이름이셨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해서 엄마와 이모들에게 그리고 사촌동생들에게도 상처를 줬던 우리 할머니는 유독 나만 예뻐하셨다. 아직도 어린 시절, 할머니가 계시던 엄마 고향 완도에 내려가면 보물단지처럼 나를 옆에 끼고 친구들 친척들에게 인사시키시던 것이 생각난다. 노래라도 한 곡조 뽑으면(나는 세 살 때부터 그렇게 트로트를 잘 불렀다고 한다) 내 옆에서 함박웃음을 웃으시며 자랑스러워하셨다.


   할머니는 해녀셨다. 동생이랑 쪽배를 타고 할머니 물질하는 것을 보러 따라다니던 생각이 난다. 엄마는 지금은 ‘내가 그때 무슨 생각으로 애기들을 그 위험한 바다에 보냈을까’ 하며 후회를 하시지만 우리에겐 아름답고 재밌는 추억이다.


   할머니는 바다 깊은 곳에서 낙지를 잡아 올려 배 위에 놓아둔 주전자 안에다 넣고 또 잠수하셨다. 그 사이에 낙지가 탈출하려고 주전자 뚜껑사이로 다릴 뻗치면, 나랑 동생은 흔들리는 배 안에서 행여나 낙지가 도망갈까 밖으로 비죽 나온 다리를 때려서 다시 들어가게 했다. 작은 조각배 아래로 넘실넘실 검은 파도가 너울대고, 우리 둘은 뱃멀미가 날 법도 하건만, 겁도 없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파도를 구경했다.


    그럴 때면 꼭 성식이 삼촌이 함께였다. 우리 할머니는 6.25 한국전쟁에 남편을 여의고 우리 할아버지는 부인을 여의고  두 분이서 나중에 아들하나 딸하나를 데리고 재혼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 아들이었던 성식이 삼촌은 약간 지적장애가 있으셨는데 우리 남매를 그렇게 이뻐했다. 외가에 가면 무등을 태워 데리고 다니기도 했고, 강아지 솔이랑 놀게 해주기도 했다.


    외할아버지는 나의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이미 편찮으셨다. 언제나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계셨다. 마을 어른들이 우리 시골집 마당에서 염소를 잡아 염소 목에서 뿜어 나오는 동맥혈이 보약이라고 할아버지를 갖다 드리면 할아버지는 그 선지를 날로 드셨다. 옆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어린 내가 “할아버지 젤리 맛있어?” 물어보면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나중에 내가 이십 대 초반에서 중반 정도 되었을 때, 다른 가족과의 불화로 우리 집에서 할머니를 모셨었다. 할머니는 그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다쳐 속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때였다. 그럼에도 나와의 관계를 즐거워하셨다.


   속이 상해 밖에서 혼자 소주를 드시고 들어오셔도 이내 나랑 드라마를 같이 보며 웃으셨다. 그러면서 꼭, 드라마에 나오는 어느 탤런트보다 손녀딸이 더  잘생겼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틀니를 하기 위해 남은 치아를 다 뽑으며 치료를 받고 계시는 때여서, 자주 할머니 드시라고 과일주스를 만들어드렸다. 그러면 할머니는 주스를 드시면서,  할머니가 호강한다고 행복해하셨다.


   할머니는 그 사람과 관계가 좋아져 우리 집에 더 머물지 않으시고 그 집으로 옮기셨다. 그곳에서 몇 달 계시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곧바로 치매가 와서 요양원으로 들어가셨다.


   요양원에서는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셨다. 나중엔 막내이모한테도 동생이라고 하고, 이모 딸에게는 이모 이름을 부르셨는데, 언제나 나만은 알아봐 주셨다. 나는 그게 참 신기하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할머니에게 첫 손주였는데, 할머니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바로 첫 손주인 나를 안아봤을 때였을까. 할머니는 내가 만나러 가면 갑자기 멀쩡해지셔서, 우리 손녀 시집갈 때까지 사실 거라고 약속해주곤 했다.


   1년 단기선교를 다녀와서, 제일 먼저 엄마랑 할머니를 만나러 요양원에 갔다. 그때 할머니는 더 안 좋아지셔서 허공에 대고 끊임없이 일하는 시늉을 하고 계셨다. 평생 그렇게 일만 하신 분이셨기에, 외가 가족 중 그 누구보다 부지런한 분이셨기에, 마음이 아팠다.  그때도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셨다. 무서운 것들이 많았는데 손녀딸이 온다고 도망갔다고 했다. 나랑 엄마는 그 무서운 것들 다시 오지 말라고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 해의 추석연휴 즈음에 할머니가 결국 돌아가셨다. 꺼질 듯 아련하던 할머니의 마지막 숨은 아픈 손가락이던 막내 삼촌이 오실 때까지 꺼지지 않고 기다렸다. 할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나는 그때 이상한 체험을 했다. 할머니를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안치했는데 화장터에 모든 가족이 함께 갔다. 동생 차를 타고 간 내가 동생이랑 제일 늦게 도착했다. 바쁜 경황 가운데 화장터에 급하게 들어섰다.


  들어가는 순간,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슬픔을 만났다. 할머니의 영혼의 마지막 인사였을까. 그 순수한 슬픔이 나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고 하염없이 울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내가 살면서 느낀 슬픔은 언제나 분노나 공포가 섞인 감정이었던 것을 알았다. 그 순수한 슬픔으로 할머니는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하셨다.


   지금도 난 할머니가 그립다. 글쓰기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불멸화 시키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할머니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내 기억 속에서 불멸하시는,  살아계신 그분의 이야기를. 아직도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기억하고 있음을 글로 써서 남기고 싶었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 다시 드라마를 함께 보며 칭찬도 받고 싶고 꼭 안아드리고 과일주스를 만들어드리고 싶다. 비록 가정불화로 우리 집에 잠시 머무신 거였지만, 그 할머니와의 시간을 허락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할머니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 우리 가족의 따뜻한 품에 품어드리고, 자그마한 손녀딸의 위로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감사하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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