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입니다.)
‘나 이제 마을버스 기다리는 중이야. 너흰 어디야?’
‘난 가는 중임. 5시 도착 예정임’
‘나도 이제 출발했어. 부지런히 갈게.’
대학교 같은 과 친구들과 성수동에 새로 오픈한 뷰티 팝업에 가려는 길이었다. 오늘은 돌림판을 잘 돌려서 꼭 괜찮은 상품을 선물로 받고 싶었다. 대기업 팝업이라 상품 라인이 어마어마했다. 향수가 당첨되면 좋을 텐데, 팩트나 마스카라라도. 어쩐지 오늘은 기운이 좋았다. 엘리베이터도 우리 층에 서 있었고, 횡단보도 신호등도 내가 가자 바로 초록불로 바뀌었다. 마을버스도 2분 후 도착 예정이었다.
정류장에서 핸드폰에 코를 박고 친구들과 대화를 하던 나는 마을버스가 오고 있나 확인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나를 향해 걸어오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중심을 잃고 “어.어!어!” 하더니 비틀거렸다. 그러곤 순식간에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순간 나도 손을 뻗어 할아버지를 붙잡아 드리려고 했는데 손이 닿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인도 위로 넘어지는 듯 했는데 또다시 균향을 잃고 이내 차도 위로 굴러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할아버지는 하늘을 보고 누워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행히 차는 없었고 내가 탈 마을버스가 오는 게 보였다. 마을 버스정류장엔 지나가는 행인도 없었다. 놀라서 온몸이 굳은 채 서 있는 나뿐이었다. 반대편 차선의 운전자가 차를 멈추고 창문을 내렸다. ”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 운전자의 외침에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차도로 내려가 할아버지를 살폈다.
” 괜찮…으세요? “
할아버지는 인상을 쓰며 ’어 구구 ‘하며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으세요? 이쪽으로 올라가실 수 있어요? “
인도를 향해 손짓을 했지만 할아버지는 말도 못하고 손만 휘이 저었다. 떨리는 손으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신고하는 것을 보더니 멈춰 있던 맞은편 차는 나를 두고 이내 가버렸다.
마을버스 운전기사는 나와 할아버지 앞에서 차를 멈췄다. 하차 손님을 내려준 뒤 2차선 도로 위의 우리를 피해 중앙선을 넘어서 다음 정류장을 향해 출발했다마을버스에 탄 탑승객들은 창문을 통해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그건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 진짜. 어떻게 해야 하지.’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바닥에 그대로 두고 나는 수신호를 하며 오가는 차량에게 사고가 났음을 알렸다. 119가 오기까지 5분이 지났을지 10분이 지났을지 모를 시간이 멈춘 듯 길게 느껴졌다.
119 대원이 할아버지를 들것에 옮기며 나를 향해 물었다.
“ 보호자세요?”
“ 아니요. 아 . 네네 맞아요.”
“그럼 같이 타세요.”
얼결에 나는 구급차에 올랐다. 정류소 근처에 병원이 있어 금방 갈 줄 알았는데 그 곳 응급실은 자리가 없었다. 30분 거리에 있는 정형외과로 간다고 했다. 구급차 안에서 대원들의 응급조치에 마음이 놓인 나는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보자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손녀분. 아직 검사 결과 나온 게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
대원 한분이 내 등을 토닥여줬다. 위로를 받자 울음은 점점 커져 사이렌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다. 한창 레고에 빠져 있던 시기였는데, 실력이 늘어가니 아빠가 점점 큰 레고를 사 주었다. 거실 한복판에 커다란 교자상을 펴 놓고 레고를 조립했다. 만들던 레고는 중간에 정리할 수가 없었고, 거실은 레고 조립실이 되었다. 그즈음 외출할 일이 생긴 엄마가 할머니에게 나를 맡기고 나간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레고를 만들었고 할머니는 레고를 집중해서 만드는 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셨다.
“우리 강아지 과일 줄까?”
“응 할머니.”
할머니는 거실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내 앞으로 걸어갔다. 할머니는 바닥에 놓여있던 레고를 미처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부품을 뒤늦게 발견하고 피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갑자기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발이 꼬이더니 곧바로 넘어지셨다. “으어어” 할머니는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할머니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 뭐해? 얼른 일어나.그렇게 아파?”
나는 레고를 만드는 손을 멈추지 못하고 할머니를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평소처럼 내 말에 친절하게 대답할 할머니를 기대했는데 할머니는 그러지 못했다. 신음 소리만 내었다.
“ 지연아…. 119에 전화 좀 해라…”
“응?”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제야 조립하던 레고에서 손을 떼고 일어나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 할머니 왜 그래?”
“ 할머니가… 일어나질 못하겠어. 전화해 얼른.”
할머니는 바퀴달린 침대에 실려 119 아저씨들과 함께 떠났다. 현관문이 닫혔다. 텅 빈 집에 혼자 남겨진 나는 더 이상 레고를 조립하기 힘들었다. 나는 침대로 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썼다. 밤이 늦도록 불도 켜지 못하고 아빠가 퇴근할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할머니는 다시 걷지 못했다. 고관절 골절이었다. 엄마는 매일 울기만 했다. 사고 후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걷지 못한다는 건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었다. 할머니의 다리는 점점 가늘어졌다. 가끔은 몸에서 썩은 내가 나기도 했다. 욕창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지병에 합병증이 생겨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다시는 레고를 만들지 않았다.
구급차 안에 누워있는 알지도 못하는 할아버지를 내려다 보면서 할머니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이번에도 내가 뭘 잘못한 걸까? 하필 내가 할아버지 앞에 서 있어서 보행을 방해한 걸까? 아까 더 순발력있게 손을 뻗어 할아버지를 부축했다면 넘어지지 않았을텐데. 모든 게 내 탓인 것 같았다.
병원에서 할아버지의 가족이 오기 전까지 수속을 도우며 마음을 졸였다. 엑스레이 촬영을 하러 간 사이 가족들이 도착했다. 내게 고맙다고 거듭 인사하며 이제 들어가 보라고 말했다. 퉁퉁 부은 눈을 한 나는 응급실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제야 핸드폰을 꺼냈다. 친구들에게서 열 통도 넘는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화면 맨 위에 이름이 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야! 너 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연락을 안 받아.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다고.”
나는 친구들 목소리를 듣자마자 또다시 울음이 터졌다.
“어… 할.. 할아버지가…엉엉…”
“ 무슨 일이야? 왜? 무슨 일 있어?”
친구의 다정한 목소리에 울음은 점차 커졌다. 친구들의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서 메아리쳤다. 울면서 나는 그동안 마음속으로 담아두었던 이 말을 어렵게 꺼냈다.
미안해…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