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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Aug 02. 2024

불그스름한 뺨

넴릿

띵~

메시지가 왔다. 그 사람이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어엿한 4년 차 직장인이 된 나는 대학 시절 추억을 떠올릴 만한 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인지 우연히 본 대학교 연합 체육대회 포스터가 유독 끌렸다. 참가 신청한 지 몇 주가 지났다. 친구들 따라 체육대회가 열리게 될 광활한 크기를 자랑하는 강당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복작 저기도 복작, 새내기 티가 팍팍 나는 학생들로 가득한 걸 보니 마치 어릴 적 초등학교 다닐 때 가장 설레고 기다려지는 운동회가 떠올랐다. 그 사람은 우연히 같은 팀으로 알게 된 사람이고, 겨우 한 번 봤다. 그 한 번도 나랑 직접적으로 만난 건 아니었다. 그저 한 공간에 있었고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 승부욕에 같이 불타면서 몇 마디만 주고받았을 뿐이다. 그 사람에 대해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냥 관심이 갔다. 그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고, 마음이 커졌다는 것도 아니다. 잠깐 동심의 세계에 빠져들어 마주하게 된 알 수 없는 감정을 가슴에 묻어두고 일상으로 금세 다시 돌아왔다.

 

다시 몇 달이 지났다. 매일같이 야근에 찌든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그날은 늦게까지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혹시 지금 시간 되면 여기로 올 수 있는지, 친구가 있는데 너도 와서 술 한 잔 어떠냐는 친근한 느낌의 내용인데 정작 발신인이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받았다. 답장을 쓰기 전에 먼저 프로필을 눌러봤다. 그러자 프로필 속에 있는 그 사람 얼굴을 마주했다. 그 알 수 없는 감정이 다시 피어올랐다. 그의 부름을 선뜻 응하지 않았지만 그날로부터 연락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느새 그도 내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그와 만남을 약속하던 날, 대학가에 만났다.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도 여전히 불편했다. 그 사람 옆에 두세 발짝쯤 떨어진 상태로 나란히 치킨집으로 걸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입꼬리가 내내 내려가지 않는 기분 좋은 불편함이었다. 닭다리를 좋아하지 않는 그가 여기로 올 때면 항상 윙과 봉을 먹는다고 해서 나도 처음 그 메뉴를 먹어봤다. 치킨 한 점 뜯을 때마다 소주 한 잔을 기울였더니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알코올 때문에 혈압이 떨어져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에게 서서히 빠지고 있는 건지 심장이 쿵쾅쿵쾅 크게 뛰는 게 느껴졌다. 한껏 달아오른 얼굴도 심장 박동에 따라 쿵쾅쿵쾅 울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마셔댔는지 방광도 질세라 터질 것만 같았다. 툭 치면 휘청거릴 것 같은 몸을 겨우 바로잡고 온 힘을 다해 괄약근에 힘주고 화장실로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씨, 매번 여자 화장실은 왜 줄이 항상 긴 거야?’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내 바로 앞사람 뒤통수와 텅 비어있는 남자 화장실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한동안 화장실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을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다리에 힘이 쫙 빠질 것만 같았다. 너무 힘들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잠시 화장실 입구 문틀에 기댔다.

 

쿵!

 

순간 본능적으로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 눈앞이 깜깜하던 걸 흐린 상태로 뿌옇다가 점점 선명해졌다. 와글와글하고 있는 여러 가지 모양과 색깔의 신발들이 내 눈앞에 유난히 크게 보였다.

 

‘아! 나 방금 기절한 거야? 미친... 방심했다.’

 

배달원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이 계속 웅얼웅얼하는 것 같지만, 애초 들리지가 않았다. 난 그저 그 자리에서 푹 고꾸라진 나 자신이 너무 낯부끄러운데 배달원의 입모양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치킨 포장을 기다리고 있다가 흠칫 놀랬을 손님들에게 삥 둘러싸인 걸 뒤늦게 인지하고 술기운으로 한껏 달아오른 얼굴이 더 시뻘게졌다. 그래도 이 와중에 다행인 건 아까 미칠 듯이 방광이 터질 것 같았더니만 감사하게도 지도를 그리지 않았고, 바지가 아주 뽀송하다는 것과 그 사람은 등지고 앉아있어서 시끌시끌한 매장 내 상황을 아직은 모르는 눈치였다. 바닥에 옆으로 누운 채로 가만히 두 눈만 끔뻑 떴다 감았다 하는 행위를 하면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가 내 모습을 보고 비웃으면 어떡하지?’

‘창피해 죽겠는데 그가 돌아보기 전에 확 튀어 나갈까?’

 

참 야속하게도 눈치가 있던 점장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침과 동시에 나름대로 철저하게 세운 나의 탈출 계획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데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찔끔 감아버렸다. 괜찮냐며 어디 다친 데가 없냐며 나를 향해 묻는 그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선입견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한 박자 늦게 찾아온 고통에 머리를 세게 찧었는지 벌그레 부어오른 이마를 문지르며 애써 태연한 척 딴청을 부렸다. 그 사이에 그가 재빨리 계산을 마치고 내 손을 덥석 잡더니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났다.


밤이 무르익자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대학가 한복판을 뚫고 그와 손을 맞잡은 채 빠른 속도로 가로질러 달렸다. 내 손을 놓치지 않게 더욱 꽉 쥔 하얗고 낯선 그의 손, 펄럭이는 그의 까맣고 큼지막한 가디건, 가끔 뒤돌아보던 그의 걱정 어린 표정을 하고 있는 듯한 얼굴, 왁스로 고정한 그의 흔들림 없는 머리칼이 하나하나 슬로 모션으로 걸린 것처럼 슬며시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술이 안 깬 걸까, 여전히 불그스름한 뺨을 그에게 들킬까 봐 길게 늘어뜨리는 머리카락 안에 숨기며 아무도 내가 술을 마시고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곳까지 숨 쉴 새 없이 멈추지 않고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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