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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Feb 26. 2024

옷이 뭐 대순가,

태용

 태영은 아닌 밤중에 땀을 뻘뻘 흘리며 거울 앞에서 고민한다. 거울 주변은 이미 옷 무덤이 된 지 오래였다. 태영은 긴 고민 끝에 흰 반팔티에 연청바지, 반팔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 반팔 셔츠에 멜빵바지로 세 가지 코디를 완성한다. 비슷해 보이지만 제각각 느낌이 다르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아 한숨이 푹푹 나오지만, 더 이상 고를 힘이 남아있지 않던 태영은 미진과 주영에게 SOS 요청을 한다. 미진과 주영은 온 마음을 다해 코디 사진을 신중하게 보고는 첫 번째 코디인 흰 반팔티와 연청바지에 투표했다. 태영은 기꺼이 나서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옷 쇼핑을 미리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한탄을 드러내었다. 친구들은 그녀에게 기본이 제일 예쁜 법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평소보다 부지런히 일어나 채비를 시작한 태영은 거울을 보며 어제 일을 회상하였다. 태영의 머리는 원래 어깨에 가볍게 닿는 단발머리로 충분히 예뻤지만, 그날따라 어쩐지 색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래서 곧잘 미용실로 출동하여 스타일 변신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레이어드 C컬펌을 부탁드렸다. 연화제를 바르고, 롯드를 말고, 샴푸를 받고, 중화제를 바르고, 머리를 말리는 등 오랜 인고의 시간이 지났다. 드디어 끝났다는 미용사님의 말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거울을 봤지만, 웬 사자가 앉아있었다. 다시 한번 거울을 들여다보지만, 절망스러운 표정을 한 사자와 마주할 뿐이다. 태영이 애써 마음에 드는 척 미용사님께 양쪽 엄지를 발사하며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미용실을 빠져나왔던 것이 어제 일이었다. 사진과 다른 것 같다고 말이라도 할걸, 뭐 한다고 엄지는 날렸을까, 후회하는 태영은 잊고 싶기라도 한 듯 고개를 내젓고는 드라이기와 고데기를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거울 속의 사자는 여전히 태영을 떠나지 않는다. 굴복한 태영은 결국 머리를 묶고 말았다. 미용실에 다녀온 보람이 없다.


 머리를 망쳤기에 옷이라도 어떻게든 잘 입고 싶었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쩔 수 없지. 태영은 기차를 타고 가며 또 다른 고민을 시작한다. 10년간 순수한 우정으로 쌓아온 친구 사이가 어느샌가 피어오른 연정 때문에 하루 아침에 남이 될수도 있는 이 위험한 도박 앞에서, 그럼에도 태영은 마치 최고의 패를 들고 있는 듯 하다. 거절당할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민혁이 싫다고 하면 그럼 앞으로 딱 3번만 만나보자 할 참이었다. 3번의 데이트 동안 나를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어? 하는 자신감으로 가득찬 태영이었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있다고 외쳐왔던 태영은 민혁을 좋아하게 됨으로써 모순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사례를 들어-만일 고백에 성공한다면-남녀 사이에 친구는 있을 수 있지만 예외는 있는 법이라고 해야겠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기차는 대전역에 도착했다. 민혁은 태영이 내리는 승강장을 확인하고는 미리 마중을 나가있다. 수많은 승객들 사이로 태영을 찾다가 반가운 얼굴이 등장하자 활짝 웃는다. 태영은 자신을 향해 무해한 미소로 웃어주는 민혁을 본 순간 지금까지 했던 모든 고민과 걱정은 다 사라짐을 느꼈다. 그래, 옷이 뭐 대순가, 당신을 만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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