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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Feb 26. 2024

가성비 좋은 거짓말

넴릿

왠지 끝날 것 같지 않은 과제를 무겁게 안은 채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벌써 어둑어둑해진 밤길 위에 친구들과 함께 걸으면서 하나같이 말이 없었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인두로 지지는 듯이 콱 박히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집에 도착할 때까지 머릿속에 얼얼할 정도로 영영 떠나지 않았다. 녹초가 되어 외투를 벗을 힘도 없었다. 그대로 소파 위에서 벌렁 누웠다. 옆에 있던 엄마가 덮고 있던 담요를 빼더니 꽁꽁 언 내 다리 위에 덮어주면서 말했다. “오늘 수업이 어땠어?” 여전히 ‘거짓말’에 영혼을 빼앗긴 채, 나는 말했다. “엄마 있잖아, 최근에 나한테 거짓말한 게 있어?”

점점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한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내게 예상 밖으로 아주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얼마 전에 네가 입었던 가디건, 그거 사실 만 오천 원 주고 샀어.”​

때는 일주일 전. 양가 어머님들을 모셔서 가볍게 인사를 나누기 위해 날을 잡았었다.

엄마가 그날을 앞두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하랴, 쇼핑해서 정갈한 니트 하나 장만하랴, 며칠 내내 꽤 분주했던 것 같다. 정작 그 엄마의 딸인 나는 그런 엄말 가만히 지켜보면서 태평하게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아, 엄마도 참 유난이야. 그냥 늘 입던 걸로 해서 가면 되지.” 엄마의 배 속에 열 달 품고 나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다른 모녀다.

딸이 호불호가 극명한 걸 알면서도 도전장을 내민 엄마는 5개의 갈색 단추가 달려있는 하늘색 니트 가디건을 내 앞으로 슬그머니 들이밀었다. 다행히도 구름같이 포근한 느낌을 들게 해주는 색감과 고가의 캐시미어에 마음을 흔쾌히 열어버렸다. “엄마 안목이 웬일이셔. 기대도 안 했는데 보드랍고 너무 예쁘다. 인정해 드립니다. 잘 입을게요.” 그다음 날 아침, 엄마가 사준 가디건을 입고 그 위에 롱패딩을 걸쳐서 활기차게 출근했다. “엄마, 나 출근할게. 이따가 따뜻하게 입고 저녁에 봐요.”

예쁘게 입혀서 보내고 싶으셨던 엄마의 애정 표현에 응답한 듯 밥 먹을 때 흘리지 않았나 수시로 훑어보고, 한 올조차 나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다녔다. 혹시 알고 있는가? 니트와 롱패딩을 함께 입는 날이 최악이란걸. 롱패딩에 줄줄이 달려있는 벨크로가 변수였다. 무심코 별생각 없이 확 벗으면 환장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슬라임을 갖고 놀다가 실수로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붙어버린 것처럼. 어쩌다 보니 심지어 그날 온종일 나무늘보가 내 몸에 빙의해서 아주 천천히 벗고 아주 천천히 걸쳐 입고는 했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되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지 않는가? 잘나가다가도 한번 까먹었다고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 벨크로에 남아있는 작은 구름을 가만히 보니 인생 최대 울상을 지었다. ‘우리 엄마가 고심해서 사주신 건데...’

그날 저녁에 사진으로만 봐왔던 남자친구 어머님을 처음으로 제대로 대면했다. “너무 보고 싶었어.” “아들 여자친구를 직접 보니 너무 예쁘네.” “아빠도 널 보고 싶어 해.” “누나도 올케가 생기면 예뻐해 주고 잘해줄 거라고 하더라.” “종종 보자.” “주일마다 기도를 드렸는데 어쩜 예쁜 사람이 와줬을까?” 어머님의 끝없는 플러팅에 막 첫술을 뜨기도 전부터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나는 정신이 혼미했다. 나를 예뻐해 주는 어머님의 모습에 내심 안심되었는지 흡족해하는 엄마와 손을 맞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딸을 빛내주고 싶은 듯한 엄마의 사랑에 복받쳐 혼자서 온종일 설레발쳤는데 알고 봤더니 고가의 캐시미어도 아닌 그냥 저렴한 니트 가디건이었다. 가성비가 좋은 엄마의 거짓말이었던 셈…. 충격에 말을 잠시나마 잃었을 무렵 우리 엄마는 참 현명했다고 생각을 전환했다. 그렇지만 만 오천 원으로 사 왔어도 나는 똑같았을 것이다. 엄마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추위를 녹이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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