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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젤리 Feb 16. 2023

아기 키우다 위내시경 받은 이야기

누우면 소가 된다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 안 되는 증상이 일주일째 지속되고 있었다. 음식을 먹지 않는 동안에도 속이 영 답답하고 체한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식이 아예 안 들어가는 것은 또 아니다. 삼십  년 살면서 이렇게까지 속이 안 좋았던 적은 처음이라 이래저래 을 해 보았다. 단순 소화불량일 수 있지만 위암의 초기증상일 수도 있기에 덜컥 겁이 난다. 젊은 사람은 진행도 빠르다던데. 채소를 많이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될 수 있단다. 어라? 그러고 보니 지난주부터 매 끼니마다 겉절이를 먹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한 번에 한 봉지 전부를 먹은 것도 아닌데 그래도 걱정이 된다. 위내시경이라도 받아볼까. 급하게 집 근처 병원 하나를 골라 전화했다.



안녕하세요, 다음 주 월요일에 위내시경 예약 가능한가요?

네, 가능합니다. 전날 밤 10시부터 금식하시 되고요, 저녁 식사도 7시 전후로 끝내주세요. 수면으로 하실 거죠?

아니오. 비수면으로 할게요.

네, 그러면 검사는 9시 30분으로 잡아드렸고 그전에 진료를 봐야 해서 8시 40분까지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간단한 통화로 내 인생 세 번째 위내시경이 결정되었다. 이전에도 위내시경을 두 번 받은 적이 있다. 모두 비수면으로. 둘 다 남편과 함께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였다. 당시에는 소중한 연차를 쓰고 갔기 때문에 과정이 간단하고 시간이 덜 걸리는 비수면을 선택했던 것이다. 모르는 게 용감하다고 했던가. 비수면 위내시경을 처음 받으면서 '내가 미쳤지. 비수면으로 하다니. 앞으로 이 짓 절대 안 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고통은 잊히고 짧고 간단했던 과정만이 기억에 남아 그다음 해에도 비수면 위내시경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TMI: 남편은 두 번째 때는 포기함). 처음과 그다음 검사 모두 위가 깨끗했기 때문에 검진 선생님조차 위내시경을 매년 받을 필요는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후로는 그냥 잊고 지냈는데... 그게 거의 2년 반 전의 일이다. 그 사이에 이사도 여러 번 하고 아기도 낳고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참에 검사나 다시 해보자 싶었다. 그리고 내 증상에 관한 인터넷 글을 아무리 읽어도 의사 선생님 입에서 직접 듣는 것은 또 다르기 때문에 이참에 진료를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간은 지난번보다 더 없기 때문에 이번에도 당연히 비수면으로.


검사 당일. 먼저 간단히 혈압을 측정하고 진료를 보았다. 일주일 간의 몸상태를 대략 말씀드렸더니 소화 문제는 위보다는 장 문제일 가능성이 90프로라면서 그래도 위를 보기는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이어진 위내시경. 가스제거제를 먹고 국소마취제를 입에 머금었다 뱉으니 목이 살짝 부은 느낌이 났다. 그러고 나서 호스 삽입. 잊혔던 고통이 되살아났다. 아, 이런 느낌이었지. 내가 미쳤지. 이걸 또 하다니. ㅠㅠ 중간중간 참을 수 없는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순간 이러다 숨 못 쉬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께서 심호흡을 하라고, 잘하고 있다며 진정시켜 주셨다. 이전에 위내시경 할 때에는 위만 봤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소화문제를 이야기해서 그런지 더 아래쪽 십이지장까지 친절히 봐주셔서 정말 너무 힘들었다. ㅠㅠ 그렇지만 고통이 금방 끝날 것을 알기에 '이건 내 몸이 아니다' 주문을 되뇌며 어찌어찌 버텼다. 검사가 끝나고 바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위, 십이지장 모두 깨끗하시네요.

그럼 속이 답답하고 이런 건 왜 럴까요?ㅠㅠ 채소 많이 먹는 것도 영향이 있나요?

네, 있을 수 있죠. 어떤 거 드세요?

그냥 하루 한 끼 반찬으로 겉절이 정도 먹는데...

그 정도는 영향 없을 거예요.

제가 아기 보느라 평소에 누워서 많이 지내는데 그래서 그럴까요?

아, 그럴 수 있죠. 아무래도 식사하시고 바로 눕거나 평소에 잘 안 움직이면 장 기능이 떨어지죠. 육아 스트레스도 있으실 거고. 지금 하드웨어는 아주 좋으신데... 이런 기능성 소화불량은 고3 수험생들한테 많이 나타나요. 스트레스 많이 받거나 하루종일 앉아서 공부하고 잠도 앉아서 자고...

(헉, 내가 고3 수험생 수준이라니?! ㅠㅠ) 결국 생활습관 문제라는 거죠? 대장내시경은 안 해봐도 될까요?

네, 아직 나이도 어리시고 대장내시경은 혈변 등의 증상이 있을 때 하는 거라 현재로서는 굳이 안 하셔도 됩니다. 소화제 몇 가지 처방해 드릴게요.

아, 아니에요. 일단 생활습관 먼저 개선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고3 수험생이라니... 내가 그 정도로 육아 스트레스를 받았었나? 요 며칠 아침에 아기가 울면서 깰 때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는 아니었는데. 요즘 들어서 많이 누워 지냈던 가? 그렇다. 아기가 주로 바닥에서 지내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나도 아기 옆에 누워서 아기를 돌보았던 것이다. 그게 이렇게 소화불량으로 나타난다고?! 놀랍다(팩트: 주 2회 필라테스도 하고 있음). 문득 예전에 외할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경상도 사투리 장착) 사람이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어 진다.
누우면 소 된데이~


그렇다. 외갓집에 가면 외할아버지는 항상 꼿꼿한 자세로 앉아계셨다. 외할아버지, 저는 아기 보느라 소가 되어버렸어요. 소는 초식동물인데... 그래서 위가 4개인가 봐요. 저도 위가 4개였다면 더 편하게 아기를 볼 수 있었을까요. 어쨌든 내 위가 아주 튼튼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앞으로는 아기를 볼 때 눕지 말고 앉아서 보겠다는 결심으로 마무리를 하겠다. 리고 평소에도 의식적으로 몸을 많이 움직이기로. 러분, 눕육아는 건강에 해롭습니다(대충 눈물 흘리며 웃는 이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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