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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젤리 Sep 07. 2023

집 나간 애엄마의 22시간

아기옷매장에 가고 육아에세이를 삽니다?

어쩌다 보니 다소 자극적인 제목이 되어버렸는데... 현재 나는 우리 집에서 약 6km가량 떨어져 있는 호텔방에 누워 이 글을 작성하고 있다. 제가 어쩌다 이곳에 와있냐면요...


분명 어제는 평온한 하루였다. 아침에 놀이터에 나가 아기와 시간을 보내고 모처럼 아파트 상가의 무인꽃집에서 꽃도 한 다발 샀다. 점심 때는 약대 동기 언니가 집에 놀러 와 맛있는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남편도 일찍 퇴근해 아기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 짧지만 혼자만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저녁도 잘 먹이고 씻겨서 평소처럼 7시 반쯤 아기는 잠들었다. 모처럼 육퇴 후 집안이 없어 구매해 놓고 한참이나 못 읽은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을 끝냈다. 11시가 다 되어 양치를 하며 잘 준비를 하는데 아기가 뒤척이더니 살짝 깨어났다. 후다닥 아기방으로 달려가 등을 토닥이며 다시 재우려는데, 이 상황을 모르는 남편이 아기방 맞은 편의 화장실을 사용하는 바람에 아기는 잠에서 완전 깨어나 버렸다. 아기는 아무리 안고 토닥여도 울고불고 난리였고 어느 정도 울음이 그친 후에는 다시 잘 생각이 전혀 없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려고 했다.


이 상황이 너무 어이없고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밤중에 깨어나 거실에서 놀고 있는 아기를 보니 갑자기 마음속에 분노가 들끓었다가 그 분노는 이내 자책감으로 바뀌었다. 내가 엄마가 될 깜냥이 안되는데 왜 아기를 낳았지, 아니 결혼을 왜 했지, 그냥 혼자 조용히 살 걸. 순간 너무나 감정적이 되어서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 모든 것을 후회하고 원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마음 상태로 아기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아기를 남편에게 맡기고 나는 먼저 잠에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아기는 5시 50분에 일어났다. 나는 어젯밤의 감정이 해소되지 않았고 너무 피로해 아기를 적극적으로 돌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아기는 더욱 나에게 안기려고 하고 나는 그만큼 충족시켜주지 못 아기는 오전 내내 울다그쳤다를 반복했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최근 몇 주간 잠을 제대로 잔 날이 손에 꼽는다. 아기와 떨어져 있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아기의 식사시간, 간식, 놀이활동 등 아기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서 잠시만 벗어나고 싶었다. 남편에게 육아 파업을 선언하고 하루만 연차를 써서 아기를 봐달라고 했더니 알겠다며 잘 쉬다 오라고 했다. 그래서 급하게 검색해 텔을 예약하고 짐을 간단히 챙겨 집을 나섰다. 이때가 오후 3시.


점심을 챙겨 먹지 못했기에 일단 아파트 상가 떡볶이집에 갔다. 떡볶이를 평소 즐겨 찾는 편은 아닌데 요 며칠 떡볶이가 먹고 싶어 일주일 새 두 번이나 먹은 상태였다. 스트레스가 쌓여 맵고 자극적인 음식이 당겼던 걸까. 떡볶이+순대+꼬마김 세트를 느긋하게 배불리 챙겨 먹고 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목적지는 성수동. 혼자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서울숲 근처 아기옷매장에 가기로 했다. 출산 이후로 내 옷보다 아기옷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많아졌다. 평소 온라인으로만 구매했던 터라 오프라인 매장은 어떤지, 내가 사지 않은 다른 옷들은 어지 궁금했다. 매장은 생각보다 작고 아담했지만 내부가 편안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지난 시즌 옷들도 구경하고 이번에 새로 나온 옷들과 인형, 포스터도 볼 수 있었다. 아기옷은 이미 온라인으로 구매했던 터라 찬찬히 둘러보기만 하고 나와 아래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겼다.


성수동은 정말로 오랜만에 는데 전보다 더 핫한 곳이 되어있었고 오랜만에 20대 젊은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이제 애엄마가 되었네, 흑. 더 이상의 일정은 없는데 아직 배는 고프지 않아 곧장 숙소로 향다. 녁 6시 반쯤 숙소에 도착해 침대에 누우니 이곳이 천국인가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티브이를 켜 채널을 돌리고 아무 프로그램이나 틀어놓고 내일은 뭐 할지 생각했다. 호텔 밖에서 아점을 먹을까 했는데 그마저 귀찮을 것 같아 조식뷔페를 신청했다. 저녁도 근처 텐동집에서 시켜 먹기로 했다. 오다 보니 만화카페가 있길래 내일 저기를 가볼까 느슨한 계획을 세웠다. 너티커피 파는 카페도 있던데 가봐야지. 좀 누워서 쉬다가 저녁 먹고 씻고 <나는 솔로> 보고 자야겠다. 남편에게 연락해 보니 아기는 잘 놀다가 이제 잠들었다고 한다. 아기가 밤새 안 깨고 잘 자야 할 텐데. 우리 셋 모두 평안한 밤을 보낼 수 있기를.




다음날 오전 8시 전에 눈이 떠졌다. 어라? 분명 <나는 솔로>도 다 보고 12시 넘어 잤는데 눈이 저절로 떠지다니. 미라클모닝을 (강제로) 매일 실천하는 엄마의 직업병인가. 어제 구매해 놓은 조식뷔페 쿠폰을 가지고 2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한 시간가량 느긋하게 음식 세 접시와 커피 두 잔을 비웠다. 원래 계획은 조식 먹고 돌아와 12시 체크아웃 시간까지 낮잠을 자는 것이었는데 잠이 하나도 오지 않았다. 간밤에 워낙 잘 자서 그런가. 어제처럼 침대에 드러누워 아무 생각 없이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아무 프로그램이나 틀어놓고 브런치에 '육아우울증'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ㅡ도대체 왜?ㅡ몇 개의 글을 읽었다. 그러다 김하나 작가의 어머니께서 5년 간 쓴 육아일기를 엮은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앗, 그 시절 육아일기라니. 갑자기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집 가는 에 있는 서점로 목적지를 정했다.


지하철역에 내리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 서점이 위치한 쇼핑몰은 내가 매주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문화센터 바로 옆 건물이다. 항상 지나갈 때마다 쇼핑몰을 구경해보고 싶었는데 아기와 함께라 느긋하게 둘러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모처럼 홀몸으로 와 1층부터 서점이 위치한 4층까지 한 층 씩 느릿느릿 둘러보며 올라갔다. 책을 찾아 결제하고, 근처 카페에서 빵과 커피로 간단히 를 채우니 이제 다시 순도 100프로의 마음으로 아기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다.




자기소개를 바꾸었다. '매일 <렙업> 중인 초보엄마'에서 '매일 <적응> 중인 초보엄마'로. 육아란 매 순간 새로운 아기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일 같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엄마로서의 나'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인지부조화를 겪는 중이다.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고 일단 오늘치 최선을 다한 것에 만족하기로. 어머니의 육아일기가 김하나 작가 인생의 보물 1호가 되었다니, 나의 이런 육아위기상황 기록도 나중에 아기에게 색다른 재미(?)가 될 수 있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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