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림 May 09. 2023

굿 바이!

-한때 내가 정말 사랑했던 그에게 

아직도 생각나요, 그날 오후의 햇살이. 주말 낮이면 당신은 늘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곤 했는데, 저는 나른하게 앉아 그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거든요. 그 위로 퍼진 오후의 햇살이 참 포근했던 기억이 있어요. 당신은 책장 가득 빽빽하게 책을 꽂아 놓았는데, 그것들에서 나는 낡은 종이 냄새도 저는 참 좋았어요. 아무 책이나 빼내어 읽어보면 나 스스로 무척이나 지적인 어른이 된 것 같아 뿌듯해지기도 하고 말이죠. 지금처럼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쓰여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같은 책들은 책 내용만큼이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오는 당신의 메모들을 읽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제가 몰래 그것들을 읽는다는 걸 당신은 알고 있었나요? 그 메모들은 누군가를 향한 애정 어린 멘트들로 가득했어요. 그럼 남의 러브레터를 몰래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고요. 


당신의 일이 잘 안 되어, 좁은 집으로 이사가야 했을 때 우리는 그 책장을 없애야 했지요. 그래서 그 책들도 함께 버리자는 말이 나왔을 때 쓸쓸하게 변했던 당신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책은 함부로 버리지도, 빌려주지도 않아야 한다던 당신인데 그 소중한 것들을 몽땅 버려야 하다니. 그러나 어쩌겠어요. 집이 좁으니 그 많은 책들을 없애야, 우리는 비로소 잠을 잘 공간이 생겼던 걸요. 차마 화를 낼 수 없어 체념한 듯 보였던 당신의 눈빛은 나를 매우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저 역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땐 그 눈빛이 너무 안쓰러워서 책을 버리자고 말했던 엄마를 정말 몰상식하고 교양 없는 여자, 라고 생각했었어요. 내가 언젠가 그 책들을 모두 찾아주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반복하면서요.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우리 집에서 책을 버리자고 했던 여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그 빈 공간을 낯선 향수 냄새가 채우기 시작했죠. 급작스럽게 우리는 이사도 가게 됐는데, 전에 없이 넓은 집이었어요. 거실이 운동장만큼이나 넓었던 그 집. 새 집을 채우겠다고 산 화장대와 침대, 가구들은 모두 그 새로운 향수 냄새의 주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오래 전부터 당신을 만나고 있었고, 당신이 갖고 있던 책 속의 러브레터도 자기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어요. 우린 앞으로 같이 살게 될 거야, 라는 말  끝에 저를 노려 보던 여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무서워 나는 황급히 당신에게 눈을 돌렸어요. 그러나 당신은 그 옆에서 무척이나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알게 된 거죠. ‘음악과 책을 좋아하는 다정한 남자’였던 당신은 아빠와 남편이라는 포장지로 감싼 채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는 무책임한 사람이었고 책을 버리자던 여자는, 교양 없고 몰상식한 아줌마가 아니라 가족과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삶을 버텨낸 연약한 여자라는 걸 말입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당신 곁엔 누가 있나요? 과연 지금은 행복한지 묻고 싶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누군가의 진심을 온전히 받을 줄도, 그것을 제대로 드러낼 줄도 모르는 당신이 안쓰러울 뿐입니다. 이미 잘못된 삶을 살았다는 걸 느꼈다 하더라도, 아마 상처준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할 거예요.       


우리가 함께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갈 때면 당신이 늘 틀던 음악이 있습니다. 영화 <젤소미나>의 주제곡과 오래된 가수 박인희의 노래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던 곡들이지만 저는 이제 더 이상 그 쓸쓸한 트럼펫의 연주를 듣지 않습니다. 청량한 여가수의 음색도 지금은 서글프게만 들리던 걸요. 하지만 덕분에 저는 영화 OST와 다양한 장르의 음악도 즐겨 듣게 됐어요. 아마 이건 당신의 영향이 컸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내 감수성에, 음악을 듣는 나의 취향에 남들과 다른 면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당신에게서 온 것이라고 저는 늘 생각하고 있어요.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당신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예요. 아마 난 앞으로도 오랫동안 당신을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거든요. 낡은 책 냄새, 그 페이지를 넘길 때의 묘한 즐거움, 당신이 책을 읽던 주말 오후의 햇살만 마음에 담은 채 전 이만 당신을 지우고자 합니다. 잘 가요, 굿 바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