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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림 Oct 03. 2023

23년 9월 5일

- 엄마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리며

  


굉장한 속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엄마의 건강을 염려하면서도 난 속으로 끊임없이 돈 문제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릿 속이 복잡해진다. 엄마가 심정지를 해야 할 만큼 큰 수술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토요일에 아이와 보기로 했던 뮤지컬, 우리 가족이 9월 말에 떠나기로 했던 하와이 여행을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하와이로 떠날 수 있을까. 아니, 간다 해도 마음 편히 놀다 올 수 있을까.      


  걱정했던 간병인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구해졌다. 나름 조선족이 아닌 사람으로 골랐고 말투와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차분한 분으로 선택했다. 간병인이 원래 12시까지 오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갑작스레 엄마의 추가 시술이 결정되면서 미뤄지고 말았다. 어지러움을 느끼는 엄마의 호소에 CT를 다시 찍어 보니 뇌쪽으로 흐르는 혈관에 또 박리가 생긴 것을 알게 된 거였다. 고혈압으로 약을 그렇게 오래 먹어 왔는데도 결국은 소용이 없는 건가 싶게, 엄마의 혈관은 강력한 혈액의 압력으로 여기저기 벌어지거나 찢어져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또 스탠트라는 것을 심장 근처에 심게 되었다.


  병원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지만 별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저 엄마가 빨리 회복하는 수밖에. 그래도 이것 때문에 여기저기 의견을 구하다가 재난적 치료비라는 것의 존재도 알게 되었고, 산정특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평소 가정 경제 수준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의료비가 나오게 됐을 경우 받을 수 있는 혜택이었는데, 이것도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이 아니었으면 이런 혜택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아는 사람만 써 먹을 수 있는 제도이다 보니, 뭐든 정보에 빠른 사람이 제일이다 싶었다.

  

  그동안은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친정에 대해 외면해 왔다. 친정에 얽힌 돈 문제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20살 이후로는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장학금을 받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내 몫을 스스로 벌었다. 아빠가 택시 운전을 하기 전까지는 백수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쓰는 모든 돈은 빚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르바이트 수준을 벗어난 정기적인 수입이 생긴 23살부터는 달마다 10만원씩 생활비 명목의 용돈을 드리기 시작했는데 그 액수는 점점 불어나 50만원씩 주는 정도가 되었다. 30대에 결혼을 하면서, 예식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내가 번 돈으로 감당했고, 결혼식 때 들어온 축의금도 엄마 아빠가 가져갔다. 그동안 엄마 아빠가 여기저기 결혼식을 다니며 뿌려온 돈의 결과이니 엄마 아빠 앞으로 들어온 돈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나중에 이사를 하게 되면 보태라고 나는 현금 천 만 원을 엄마에게 주고 나왔다. 그 돈을 건네면서 나는 스스로 할 만큼은 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한테 주는 용돈은 끊을 수 없었다. 아빠가 벌어오는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겐 계속 50만원을 주었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아이를 봐준다는 명목이 생겨 100만원으로 용돈을 늘렸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엄마는 아빠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 해소를 나에게 시도했다. 어쩌면 그냥 맞장구를 치는 리액션 정도만 바랬던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엄마 아빠의 기질적 차이와 그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의 순환을 계속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서로 증오해 마지 않으면서도, 눈만 마주치면 쥐잡듯 서로를 잡아대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그들이 징글징글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엄마가 아빠에 대해 불평불만을 쏟아내면 듣기 싫다며 입을 막고, 그렇게 살 바엔 차라리 이혼하라는 소리도 밥 먹듯이 했다. 솔직히 이젠 친정과 관련된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이 강해진 탓에 억지로 빠져나오려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빠가 오랜 백수 생활을 끝내고 택시 운전을 했지만, 2년 정도 그마저도 그만 두고 쉬었던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자신의 보험비를 낼 면목이 없다며 13년 동안 납부하던 실손 보험을 해지했다. 먼저 엄마가 나에게 보험 해지의 뜻을 내비쳤을 때 나는 당연히 엄마를 말렸으나 그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금액을 들었을 때, 내가 마음의 짐을 얻게 될까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얘기하기 시작하면 보나마나 돈 얘기일 게 뻔하니 개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난 느린 아이의 육아 때문에 수업을 많이 줄인 상태라 돈 이야기가 나와도 엄마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고, 한 달에 30만원 내지 50만원의 돈을 용돈의 명분으로 주는 것도 벅찬 상태였다.

  엄마의 나이와 고혈압과 고지혈증, 그리고 만성적인 관절염과 허리 통증 때문에 보험료가 좀 비쌌던 것 같은데 엄마는 돈도 못 벌면서 자기 몸을 위해 그 돈을 쓰는 게 죄스럽다고 했다. 나와 동생의 만류에도 결국 보험을 해지한 엄마는 지금껏 낸 돈의 일부를 다시 받을 수 있다며 오히려 좋은 일처럼 말했었다. 엄마가 매달 납부하던 보험비는 월 30만 원이었다.

  

  그때 그렇게 모른 척 흘려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어차피 아빠는 다시 일하게 되었고 점점 나이 들면서 병원에 돈 들어갈 일이 많았는데, 그때 그 순간만 참고 견뎠으면 지금 이렇게 돈 때문에 고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오래된 가난과 그로 인한 두려움, 눈 앞의 현실에만 급급하게 되는 좁은 시야와 무지. 그것으로 인해 지금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걸 해지한 게 올해였는데 1년도 채 안 된 사이에 이리 될 줄 알았다면 엄마는 같은 선택을 했을까.      

  

  밥을 차리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그곳엔 엄마가 갖고 온 오이지 무침과 한 통 가득인 김치, 그리고 비닐에 둘둘 말려 있는 못생긴 호박이 있었다. 전에 준 것도 아직 다 못 먹어서 냉장고 속에서 말라비틀어져 가는데 새것을 또 가져왔다고 툴툴거렸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못생긴 호박 3개를 천 원에 판다고 신나서 말하던 엄마의 들뜬 얼굴도 난 그저 슬쩍 보고 넘겼었다. 그게 뭐 대수라고. 그냥 호박일 뿐인데. 필요하면 또 사면 되는 것을. 나는 엄마가 부탁하지도 않은 짐을 잔뜩 가져왔다고 속으로 불평을 터뜨리고 있었다.

  안 먹는 약이라고 시어머니가 주셨던 비타민 D를 몽땅 버렸을 때도, 미니멀 한다고 수저 커트러리 세트를 거의 거저 주다시피 정리했을 때도 엄마는 불같이 화를 냈었다.

  “내가 번 돈, 내 맘대로 쓰지도 못해? 안 쓰는 물건 너저분하게 있는 거 스트레스야!”

  화를 내며 돌아앉은 엄마의 등 뒤로 이런 말을 쏟아냈다. 그 말을 끝으로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우리 집 문을 나섰었다. 그때는 벌 만큼 벌고, 내 앞가림 제대로 하는데도 가난한 친정의 방식대로 나를 책망하는 엄마가 싫었다. 나는 더 이상 그때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 돌이켜 보니, 돈이 없어 십 년 넘게 납부해 온 보험도 해지했던 엄마에게 그 말은 상처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낡은 수저 세트를 쓰면서도 돈이 없어 새 것을 사지 못한다는 엄마에게, 나는 엄마가 내게 혼수로 마련해 준 수저 세트를 내밀며 가져가라고 했다. 없는 살림에도 간신히 마련해서 결혼 선물로 준 수저 세트를, 있어 봤자 안 쓸 게 뻔하다며 내미는 딸을 보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엄마가 수술을 받는 동안 동생과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10년 넘게 고시 공부를 해오다 낙방한 동생은 요즘 배달 일을 하고 있다. 일을 하면서 몇 천 원짜리 하나를 사 먹으려다가도 이건 배달 몇 건 값이네, 라는 생각에 망설이게 된다고 했다. 아빠는 종일 말없이 택시를 몰다가 집에 와서도 대화 한 마디 나눌 사람이 없어 텔레비전만 본다는 얘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친정의 이미지가 다시 떠올랐다. 내가 33년 동안 살던 그곳은 어두컴컴한 굴 속 같았다. 예전에는 우리 집이 반지하라서 그런 거라 생각했지만 지상 3층의 집으로 올라온 뒤에도 그곳은 여전히 굴 속이었다. 햇볕이 창문 가득 들어차도 모든 게 무겁게 내려 앉은 곳. 들어서면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먼저 나를 맞이하는 곳. 군데군데 깨진 돌계단을 따라 올라갈라치면 급한 경사에 아찔해지곤 했는데 함부로 손잡이도 잡을 수 없었다. 녹슬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손잡이는 내가 조금만 힘주어 잡을라치면 벗겨진 페인트 찌꺼기들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는 무릎이 안 좋아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 하면서도 그 손잡이를 한 번도 잡은 적이 없다. 그저 무기력하고 힘없는 발걸음들이 늘 어렵사리 한 칸 한 칸 위로 올라야 하는 곳.


  그동안 난 결혼을 한 후, 잠깐 밝은 곳에 있으면서 그곳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와 남편 명의의 집을 마련하고 내 이름을 건 교습소를 운영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동네에서 적어도 중간 이상은 한다는 자부심으로 사는 동안 난 잊고 있었다. 그곳이 내가 원래 있던 곳이었음을. 내가 지금은 밝은 이곳에 있지만, 결국은 그곳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내가 그 무거운 현실과 완전히 떨어지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엄마의 수술과 그 뒤처리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한 번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마 앞으로 가족들과 좋은 곳에 놀러 가면서도, 배달 일을 하는 동생과 택시에 손님을 태우고 밤길을 달리는 아빠를 떠올릴 것이다. 아이에게 비싼 소고기를 먹이면서도, 늘 제일 싸고 질긴 고기로 요리를 준비하는 엄마와 그것을 묵묵히 먹는 가족들을 생각할 것이다. 명품 가방을 들고 해외에 다녀온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내가 사 준 닥스 지갑을 10년 넘게 들고 다니는 엄마와 해외 여행 한 번 가 보지 못한 동생과 아빠를 떠올릴 것이다. 오랜 가난에 익숙해져 늘 작아지고 감내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행복한 일이 있어도 마음껏 소리 내어 웃거나 기뻐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온당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나 혼자 그 어둠 속에서 빠져 나와 밝은 곳에 있다는 것이 죄스러워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23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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