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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림 Feb 08. 2024

8.5층만큼의 간극

- 그곳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


  우리 부부가 처음 신혼 생활을 시작한 곳은 잠실의 한 원룸 아파트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발장부터 부엌, 거실이 일직선으로 한 눈에 좌악 들어오는 곳. 부부 싸움이라도 하는 날엔 화가 나도 어디 틀어박힐 공간이 없어 하는 수 없이 화장실에 들어가야 하는 집이었다.

  그곳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무더운 여름날, 강남 한복판에서 밤을 새웠다. 번호표를 받으려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5, 60대 아줌마 아저씨들 속에서 유일한 20대였던 우리는 혹시라도 우리를 만만히 보고 누가 새치기라도 할까봐 잔뜩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를 해야 했다. 그러나 무서운 기세로 밀려온 더위는 새치기를 하려던 마음도, 그것을 막아설 기력도 흐물흐물 녹여버려 모두를 늘어지게 만들어 버렸다. 강남 사거리 한복판 모델하우스 앞에 조르륵 순서대로 앉은 우리는 기운 없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으며, 꾸벅꾸벅 조는 상대에게 어깨를 빌려 주었다.

  내 집을 갖는다는 의미를 잘 모르던 나에게 그날의 기억은 그저 ‘남자친구와의 재미있는 하룻밤’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은 ‘내 집’ 마련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대출금으로 인해 빚이 생기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자고로 큰 돈을 벌기 위해선 빚 따위를 무서워하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렇게 긴 기다림 끝에 우리가 얻게 된 층은 8층. 남편은 나름 로얄층을 얻었다며 매우 기뻐했지만 한번도 아파트에서 살아본 적이 없던 나는 그 말이 그닥 와닿지 않았다. 그저 반지하가 아닌 곳에서의 생활은 어떤 것일까, 잠깐 궁금했을 뿐이었다.     


  결혼 전까지 내가 가족들과 살았던 곳은 반지하의 방 세 칸짜리 집. 여름에도 서늘함을 느낄 정도로 축축한 곳이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퀴퀴한 습기의 냄새가 덮쳐오고 방마다 장롱 뒤편으로 시커멓게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욕실에 걸어놓은 수건은 한 번 쓰면 절대 마르지 않아, 젖은 수건으로 젖은 손과 얼굴을 닦는 일이 예사였고 아무리 난방 온도를 높여놔도 바닥만 지글지글 끓을 뿐, 이불 밖으로 나온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래서 이불을 덮고도 코끝은 늘 시리고, 네 식구 모두 콧물을 훌쩍이는 게 당연하던 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살면서 한 번도 불편하다거나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도 우리는 여느 사람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았고 웃다가 울다가 꿈을 꾸기도 했으니까.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거리낌없이 친구들을 집으로 불렀고, 하룻밤 재우기도 하고, 눅눅하고 습한 화장실에서 씻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권했다.  

  그런데 조금씩 차이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원룸 아파트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나서부터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반지하와 8층에서의 삶을 견주어 보게 되었다. 8층 아파트 욕실의 수건은 아침에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고, 그곳에선 비가 와도 곰팡이가 생길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창문에 결로도 생기지 않았으며, 장판이나 도배지가 들뜨는 일도 없었다. 난방을 23도로만 유지해도 얇은 이불을 덮어도 될 만큼 따뜻했고 나는 언젠가부터 콧물을 훌쩍이지도,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손을 호호 부는 일도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잠이 깰 수도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았으며, 방 안이 어두운 탓에 아침부터 불을 켜는 게 습관이었던 나는 서서히 자연의 빛만으로도 낮 시간을 보내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결혼 후, 처음으로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다. 친구들은 한눈에 들어오는 원룸이 너무 귀엽다고, 신혼 때는 서로 내내 붙어 있으니 원룸이어도 상관없다는 농담을 하며 집에 들어섰다. 우리 중에서도 제일 먼저 결혼을 한 정희는 우리집 소파에 앉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여긴 전세가 얼마야?”

  뜻밖의 질문에 내가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나 대신 이 집은 자가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정희는 정말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렇게 말했다.

  “서림아, 너 출세했다, 진짜! 시집 가더니 성공했네에.”

  정희의 말에 뼈가 있는 것도 같았지만 나는 잠자코 웃으며 과일을 깎았다. 학교를 다닐 때 나는 늘 과외 알바로 바쁜 학생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과외를 하러 가느라 아이들과 쇼핑을 가거나 저녁을 먹는 일에 끼지 못했다. 당연히 함께 술을 마시거나 놀러가는 일에도 빠질 때가 많았다. 어차피 과외비로 돈을 받는 족족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등록금을 대느라 개인적으로 쓸 돈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닥 아쉬움은 없었다. 그래도 짬을 내어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영화를 보거나 읽고 싶은 책을 살 여유는 있었으니 난 그것으로 족하다 싶었다. 그러나 학원 강사로 일하던 정희는 월급을 받으면 무조건 명품 브랜드 가방이나 구두를 사는 아이였기 때문에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넌 얼마나 대단한 부자가 되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사니? 니 청춘이 아깝다, 너도 좀 꾸미고 다녀.”

  나중에서야 나는 정희가 뒤에서 나에 대해 ‘억척스런 시장통 아줌마’ 같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을 건너듣게 되었는데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한 일이었어서 그닥 놀랍지는 않았다. 아마 정희는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서도 돈이 없어 보이는 내가 한심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 집에 정희를 초대하고 같이 자고,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함께 먹었었다.

  “야,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예전에 너희 집 놀러갔을 때, 씻으려고 욕실에 들어갔다가 얼마나 당황스러웠다구. 이런 데서 샤워를 어떻게 하나 싶고. 맨날 거기서 씻고 잠들 너를 생각하니까 에휴 얼마나 안쓰럽던지. 정말 잘 됐다, 얘!”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아직도 그곳에서 씻고 잠드는 친정 식구들을 생각했다. 김이 폴폴 올라오는 계란말이와 된장찌개를 먹으며 맛있다고 엄마에게 웃어주던 정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정희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우리 엄마를 안쓰럽게 봤을까.

  정희는 시댁에서 인천에 40평짜리 집을 마련해주신 덕분에 집 걱정은 하지 않고 신혼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우리 중에 자기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늘 정희는 집이 있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친구들이 옆에서 내가 잠실에 집을 마련한 것에 대한 부러움을 표하자, 자기는 서울에 집을 얻어 주신다는 부모님의 권유가 있었지만 좁은 곳에서는 살 수 없어 인천에 사는 대신 넓은 곳을 선택했다고 구구절절 설명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는 빚이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나를 힐끗 쳐다 보았다. 그러나 나는 친구들의 부러움도, 정희의 설명 따위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아직도 반지하 집에 남아 있는 친정 식구들을 생각했을 뿐이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친정에 도착해 현관문을 여는 순간 덮쳐오는 곰팡이 냄새를 나 스스로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그 냄새는 오랜 시간 머무르던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욕실에 들어가 축축한 슬리퍼를 신으며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고, 가지런히 칫솔이 놓인 칫솔통 주변으로 점점이 박힌 곰팡이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난방비가 무섭다고 보일러를 트는 대신 온수매트를 깔아놓았는데 그 탓에 매트 위가 아니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지 못할 정도로 바닥이 차가웠다. 아귀가 맞지 않는 창틀 틈으로, 벽 너머로 계속 한기가 새어 들어와 나도 모르게 연신 상체를 웅크린 채 팔을 문질렀다. 그걸 보더니 조끼며, 후리스를 겹겹이 입은 엄마가 나에게 얇은 점퍼 하나를 꺼내어 입으라고 건네 주셨다.

  “너 온다고 해서 난방을 틀었는데도 아직 한기가 도네. 조금 있으면 따뜻해질 거야.”

  엄마는 그 말을 하면서도 훌쩍 콧물을 들이키고, 가래가 섞인 기침을 했다. 병원에 가라고 했더니 엄마는 별 거 아니란 듯이 말했다.

  “엄마가 천식이 있대. 이건 그냥 약을 계속 먹는 수밖에 없어.”

  나는 엄마가 언제부터 이렇게 기침을 했던가 돌이켜 보았다. 어쩌면 나 역시 계속 이곳에 살았다면 천식이 생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를 온수매트 위에 앉힌 뒤, 나는 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그 어느 때보다 푸짐하고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먹는 내내 음식이 목에 턱턱 걸렸다. 모든 것이 다 제자리인 이곳에서 나만 혼자 쏙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아직도 그곳에 있는 식구들에게, 예전의 나처럼 아무렇지 않아 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밥 그릇에 고개를 박고 고작 이런 말을 했을 뿐이다.

  “나중에 더 추워진다는데, 창틀에 바람막이 비닐 붙여줄게.”


  집에 돌아오며 내가 했던 다짐은 과외 수업을 더 늘려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친정에 주는 용돈을 늘릴 수 있었다. 이미 포화상태였던 수업 스케쥴이었지만 주말을 포함하여 평일 내내, 오전 8시 30분부터 새벽 2시까지 모든 시간을 수업으로 채웠다.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며 투덜거리는 남편의 불평도 뒤로 한 채, 나는 하숙생마냥 종일 밖으로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면 쓰러져 잠만 잤다. 눈에 띄게 말라가는 나를 보면서, 남편은 내가 대출금 때문에 무리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나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수업과 수업 사이의 짜투리 시간도 아까워 나는 끼니를 거르거나 김밥으로 때우기 일쑤였는데, 추운 겨울날 전면에 찬바람을 맞아가며 딱딱해진 김밥을 입에 욱여넣었을 때조차 친정에서 먹었을 때만큼 목이 메이진 않았다. 나는 친정에 보내는 용돈을 늘리면서 나만 빠져나왔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왜 우리 가족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곳에 살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다달이 용돈을 드렸고, 내 결혼 비용을 나 혼자 전담했고, 그러고도 내가 모은 돈을 모두 주고 나왔음에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그곳에 살면서 불편함을 느끼거나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가족도 굳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흘러 우리 부부는 아이가 생기면서 결국 원룸을 벗어났다. 그리고 투룸을 거쳐, 지금은 쓰리룸 아파트에 살고 있다. 더 이상 로얄층도 아니다. 뛰는 게 일상인 아이에게는 1층이 제일인 법이다. 친정 식구들 역시 우리가 방을 한 칸씩 늘려가는 동안 한 층씩 위로 올라와 지금은 3층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엔 여전히 곰팡이와 우풍과 가래 섞인 기침이 있다. 아직도 친정과 나 사이엔 8.5층만큼의 간극이 남아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친정집의 현관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남모를 죄책감을 느끼고, 조끼와 후리스를 겹쳐 입은 엄마를 볼 때마다 입 안이 까끌거린다. 남들 눈에 나는 학군지에 번듯한 집 한 채를 갖고 있는 사람일 테지만, 나는 아직까지 내 집을 마련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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