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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다연 Nov 24. 2021

삶의 무게

잃어버린 7년 그리고 엄마

늘 시간에 쫓기고 가득 찬 스케줄에 버거워한다.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 못하고, 혹여 내게 휴식의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나를 엄습한다.

이런 마음을 들킬세라 마치 역마살이라도 낀 것처럼 나의 마음은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대체 언제부터 나에게 이런 강박관념이 생기고, 지나친 완벽주의자가 되고 말았을까.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본다. 사람들은 때때로 예기치 못한 슬픔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러나 나의 슬픔은 그 정도를 벗어나 깊이가 한없이 빠져든다. 


 내 가슴속에 깊이 내재한 깊은 슬픔의 첫 번째 파편은 엄마로부터 시작한다.

 스믈이 되던 그 해 늦가을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식탁에는 아랫집 이웃과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메모 한 장만 남겨져 있었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흔하게 보급된 시절도 아니었고, 기껏해야 호출기와 공중전화가 즐비했던 때였다. 집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가 오질 않아 이상하게만 생각되었던 금요일 그날 밤 잠을 설치고 만다. 그러나 다음 날인 주말에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불안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별생각 없이 또 하루가 지나갔다.

 드디어 일요일 아침 8시 전화가 울렸다. 

 반가운 마음이 반이라면, 연락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린 부모님에 대한 원망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그런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병원이었다.

 엄마가 좀 다쳐서 보호자 분이 급하게 내려오셔야겠다는 전화를 받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속초행 비행기를 타고 나는 혼자서 강릉으로 향했다. 


 강릉 ㄷ병원에 도착한 나는 도저히 진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현실에 한참을 멍하니 넋이 나갔다.

 함께 강원도로 여행을 가셨던 부모님은, 내려간 금요일 그날 밤 교통사고를 당했고 보호자가 없어서 응급수술도 들어가지 못했으며, 이미 의식이 없어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에 얼음같이 차가운 피부, 마치 시체처럼 중환자실 한 곁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에 도저히 나의 엄마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이송 도중 사망의 위험이 크다고 병원에서는 보내주지도 않았다. 나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그 허름한 병원에서 신문지를 덮어쓰고 눈물로 지새웠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사고 당시 부모님 두 분은 근처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엄마의 상태가 위중해서 다른 병원으로 보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고 당시 의식이 있었던 아버지는 그 이후 정신을 잃어 서로 헤어지게 되었고 보호자 연락이 되기까지는 이틀이나 되는 시간이 흘러버린 뒤였다.

 사고 직후 엄마의 의식이 있었을 때 뇌수술을 들어갔다면 그래도 소생 가능성이 50% 정도는 있었다고 하는데, 이미 시간이 흘러 의식이 없기에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더구나 너무나 화가 나는 일은 사고 장소 바로 근처에 시설 좋은 ㅇ병원이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2시간이나 힘든 길을 돌아서 허름한 시골 ㄷ병원에 보내진 것이었다. 그런데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차에 탑승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고, 그 차는 무보험 차량인 것으로 판명이 났다. 

 이미 시골병원에서 일주일을 허비한 환자는 서울 대학병원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고. 너무나 어린 나에게 사회는 가혹하기만 했다. 엄마는 식물인간 상태로 나와 함께 7년이란 시간을 함께 했다. 

 살기 위한 우리 모녀의 처절한 몸부림은 2주마다 다가오는 병원비 수납과 간병비로 점점 지쳐갔다. 가세는 기울었고 나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한참을 공부하고 놀러 다니기 바쁠 이십 대의 나는 어둠과 절망, 그리고 눈물의 도가니였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병원 간이침대에서 단 하루도 두 발 뻗고 잠을 청한 적이 없었다. 그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넘겼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눈시울이 다시금 뜨거워진다.


 기도삽관으로 호흡에 의존하던 엄마는 매 번 썩션을 해주어야 했고, 대소변을 다 받아야 했다. 주먹만 한 욕창이 뼈까지 앙상할 정도로 몇 개씩 생겨 30분마다 밤새 몇 번을 돌려 눕히고, 어떻게든 그 당시에는 내 모든 걸 다 바쳐 살리고만 싶었다. 아버지부터 줄기차게 포기하자고 했지만, 나는 엄마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도 단지 내 곁에서 있을 수 있는 존재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힘이 났다.

 병원에 있는 기간 동안 굶기를 밥 먹듯이 했고, 너무나 허기가 밀려올 때는 누가 먹었는지고 모를 환자들이 먹다가 내어 놓은 음식 찌꺼기를 미친 듯이 주워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거식증이 걸려 한 동안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나의 선택이 과연 옳았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남들이 성장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던 그 시기에, 나는 눈물겨운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유학도 가고 싶었고, 외국 지사에 발령받을 수 있는 기회도 놓쳤기에 안타까움이 늘 내재한다. 그런데 그 시절 그 시간으로 다시 되돌린다 해도 나의 선택은 변함이 없을 것 같다.


 생명이란 인간 마음대로 좌지우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고통스럽고 힘든 삶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진정으로 소원한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늘 긍정의 마인드를 가지고 살고 싶다.  남들보다 뒤처진 잃어버린 7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인지, 아니면 단 한순간도 편히 쉴 수 없었던 지난날의 아픔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늘 정신없이 분주한 나의 일상사가 나를 발전시키는 순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조금 걱정이 된다.

 힘들었던 그 시간이 나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믿음과 함께, 나의 선택이 결코 그르지 않았다고 토닥여주고 싶다.

 나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지켜주고 싶었던 엄마, 그리고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가 남지 않는 지금의 나에게, 이제는 삶의 무게를 하나씩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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