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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Apr 09. 2023

적당하다는 건

마이클 콜린스, 이니셰린의 밴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마틴 맥도나의 ‘이니셰린의 밴시’(2022)라는 영화를 흥미 있게 보았다. 아일랜드 영화는 몇 편 못봤는데 그나마 전쟁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이 영화도 1923년 아일랜드 어느 섬을 배경으로 한 전쟁 우화이다. 지구 어디서건 파벌은 존재해 왔다. 갈등이 멈춘 적은 없다.       


영국의 아일랜드 침공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12세기부터 아일랜드를 차츰 점령하기 시작해 17세기에는 식민지로 삼기에 이른다. 영국 국교회는 가톨릭교도의 재산권을 제한하고 공직 진출을 방해하는 등 피지배국의 주권을 갖은 방법으로 침해한다. 1919년에야 나라의 독립을 선언하지만 영국이 응할 리 만무다. 격렬한 반영 무장 투쟁을 치른 후에야 얼스터 북부를 제외한 나머지 주들을 중심으로 1921년 영국과 자치령 조약을 맺는다. 얼스터 지역은 영국이 식민정책의 하나로 신교도를 의도적으로 많이 이주시킨 곳이다. 이때 영국과의 조약을 성사시킨 이가 마이클 콜린스(1890~1922)이다. 닐 조던의 ‘마이클 콜린스’(1996)로 잘 알려진 그 인물이다. 나라는 마이클 콜린스에의 지지파와 반대파로 들끓는다. 반대파들은 이 조약이 불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아일랜드 자유국(IFS, The Irish Free State)과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The Irish Republican Army)으로 분열, 내전(1922.7~1923.5)으로 치닫는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제목부터 참 낯설다. 이니셰린은 가상의 섬, 밴시는 켈트신화에 나오는 여자 정령으로 죽음을 예언하는 초자연적 존재한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극 중 인물인 콜름이 작곡한 곡으로 이 나라 특유의 정서를 상징한다. 아일랜드인들은 오래도록 편치 않았다. 수백 년을 식민지로 살아야 했던 약소국 사람들이니 슬피 울고 한탄할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죽음을 속삭이는 귀신 이야기가 아이들에게조차 친숙하다. 그 정도로 죽거나 실종되는 이들이 넘쳤다. 독립이 되었는데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정상을 회복하려면 불운한 세월이 길었던 만큼 넘어야 할 고개도 계속된다. 영화에서는 으스스한 맥코믹 부인이 밴시 역할을 한다. 그녀는 섬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예언한다. 멀리서나마 그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건너편 육지에서는 아직 대포 소리, 총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이니셰린은 조용하기 그지없다.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난하고 또 지루한 삶이 계속된다. 론 하워드의 ‘파 앤드 어웨이’(1992)나 세바스찬 렐리오의 ‘더 원더’(2022)에 나오는 황량한 산촌 모습 그대로다. 몸 바쳐 일할 산업도 없고 취미 생활을 할 여력도 없는 곳이다. 마치 세상이 멈춘 듯 변화라고는 없다. 그저 부모들이 살아왔던 대로 일하고 먹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니셰린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콜름이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한 것이다. 그들은 오래도록 친밀한 사이였다. 둘은 술잔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내왔다. 파우릭에게 콜름은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절친이었다. 이런 사람이 갑자기 둘 사이를 끝내자고 한다. 말도 걸지 말라는 거다. 그 이유란 게 어처구니없게도 심각하다. 콜름은 파우릭이 지성적이지 못하며 말할 거리도 없는 따분한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이제는 제대로 된 일만 하면서 살기로 했단다. 그 일이란 연주와 작곡을 말한다. 경고를 무시하고 말을 걸면 제 손가락을 자를 것이라고 위협한다.     


별일이 다 있다. 하루아침에 둘 사이를 끝내는 것도 모자라 관계를 이어보려 애쓰는 친구에게 자해 협박까지 하다니. 게다가 콜름은 바이올린 연주자다. 손가락을 자른다면 연주는 대체 어떻게 하려는지.


이런 일을 당한 파우릭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다. 그 좋았던 친구가 왜 저럴까. 비참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파우릭은 자신이 나이스 하다고 여겨왔다.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평가할 거라고 자부한다. 그런데 그 ‘나이스’, 적당하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괴팍하지 않고 무난한 사람, 지금도, 앞으로도 빛날 건 전혀 없다. 죽으 잊힐 사람이고.      


콜름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람만 좋으면 뭐 하나. 태어났다면 대단한 걸 이루어야지.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안다. 그의 위대한 음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차르트 주위의 착한 이들은 잊혔다. 콜름은 공허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뭔가 남겨서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바란다. 멍청한 파우릭과 어울리다간 시간만 빼앗길 뿐. 차라리 서로 낯선 사람이 되는 게 낫다.     

 

두 사람은 내전 중인 IFS와 IRA를 의미한다. 그들은 한 때 동지였다. 그러나 현실 정치는 녹록지 않다. 타협 세력은 영국과 조약을 맺어 IRA의 급진세력을 자극했다. 굴욕적인 조약을 맺은 배신자로 급진파의 타깃이 된 마이클 콜린스는 암살된다. 한배에 탔던 민족주의자들 간 갈등이 첨예화된다. 아일랜드는 독립이 되자마자 내전의 광풍을 맞는다. IFS는 파우릭, IRA는 콜름으로 여겨진다. IFS는 완벽하지 않지만 조국의 독립을 얻어냈다. 웬만하면 원만하게 해결하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아직은 강력했던 영국제국으로부터 이런 이득을 얻어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급진 IRA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수백 년간 식민지로 살아왔는데 더 이상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 그들은 파우릭처럼 대충 만족하는 이들을 증오한다. 차라리 전쟁을 벌여서라도 그들과 단절하는 게 낫다. 양 파벌 사이에는 양보가 없다. 둘 사이의 내전은 자해나 다름없다.


그래서 콜름은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파우릭의 집 앞에 던져 버리는 거다. 손가락은 나날이 줄어들고 손은 피투성이가 된다. 물론 파우릭도 참지 못한다. 사랑하는 당나귀가 콜름의 손가락을 먹고 죽은 것이다. 그는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른다. 제의처럼 경건한 자세로. 콜름이 아끼는 예술품, 악기, 악보가 불에 타 사라진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도 이 시절을 그린 작품이다. 그리스 고전 비극처럼 비정하고 비장한 이야기 전개에 마음이 먹먹했던 기억이 다. 테디와 데미엔은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투쟁해 온 친형제이자 전우다. 이 과정에서 데미엔은 크리스의 밀고로 동료들을 잃었다. 크리스를 사랑하지만 배신자에게는 사형이 마땅하다. 크리스의 모친은 아들을 쏘아 죽인 데미엔을 향해 ‘두 번 다시는 너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형제는 나라를 해방시키는 데에 협력했지만 내전을 앞둔 입장은 엇갈린다. 테디는 영국과의 조약을 ‘완전 독립을 위해 고개를 숙이는 일시적 발판’이라며 받아들인다. 반면 데미엔은 반쪽 독립이라고 분개한다. 형은 IFS를, 동생은 IRA를 선택한다. 어제의 동지였던 형과 동생이 오늘은 적이 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결국 테디는 포로가 된 데미엔의 처형을 명령하고야 만다. 데미엔의 애인은 테드를 향해 ‘두 번 다시는 당신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긴다. 내전은 반영 투쟁을 반복한다.

        

‘이니셰린의 밴시’ 말미에 콜름은 이제 전쟁이 끝난 것 같냐고 묻는다. 파우릭은 곧 다시 시작할 거라고 답한다. 그들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복수 혈전을 벌였다. 이제 의 싸움은 끝난 건가. 아닐 것 같다. 근원적인 죄의식, 완결 짓기 못한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일랜드는 1922년 영국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했다. 2차 대전 때는 압력을 무릅쓰고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1949년에는 영연방에서도 탈퇴했다. IRA는 내전에서 패배한 후 아일랜드 내에서는 거의 궤멸되었다. 그 후에도 얼스터지역 6개 카운티는 계속 잉글랜드령 북아일랜드로 남아 IRA의 부활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1998년 성금요일 협정(벨파스트 협정) 이후에야 아일랜드는 내전 종식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곳의 신교와 구교 갈등은 오늘날에도 세계의 문제 거리 중 하나다. 콜름과 파우릭이 주고받는 마지막 대사가 이를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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