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사라졌다
안나 카레니나, 인간 짐승, 산시로
인류는 새로운 문명으로 진입한다. 대부분은 선두 주자가 이끄는 곳으로 끌려간다. 누구에게나 낯선 곳이다. 과학자나 사회학자들도 10여 년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것 같다. 사람들은 변화를 희구한다. 문명은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방향을 향한다. 에밀 졸라는 그의 소설에서 인간성을 일컬어 ‘영원한 생성을 낳으며 끝없이 작동하는 거대한 메커니즘’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방향, 속도에 점점 의구심이 생긴다.
사람들은 별안간 등장한 새로운 문물 앞에 놀란다. 그들은 지루하면서도 목가적인 세계가 사라지는 걸 목격한다. 감각이 적응하기도 전에 다른 풍경이 몰려온다. 어제까지의 신비가 없어졌다.
200여 년 전 증기 기관차의 발명은 사람들의 삶을 급속하게 바꾸었다.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 사회문화 요소만 아니라 시공개념이나 감각까지 변화시켰다. 사람의 걷는 속도는 시속 5km, 마차는 10km 정도이다. 이동 거리도 크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초에 느린 삶을 뛰어넘는 열차가 출현했다. 지금으로 보면 별것도 아닌 시속 30~40km의 기차를 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발사된다고 느꼈다. 배달되는 물건처럼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를 살았던 작가들도 혼란과 두려움에 빠졌던 것 같다. 기계는 편리하지만 동시에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며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주제를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1878)에게서 찾았다. 작가는 소설의 처음과 끝에 기차 사고를 배치한다. 안나는 오빠 부부를 방문하려 모스크바역에 도착한다. 그 시각 후진하는 기차에 선로지기가 치여 죽었다. 이 무서운 죽음에 어떤 구경꾼은 ‘가장 손쉽고 순간적인 죽음’이라고 말한다. 안나 역시 이 사건이 불길한 징조임을 알아챈다. 미래에의 예감이다.
안나의 마지막은 소설 첫머리를 반복하면서 끝난다. 브론스키 공작과의 불륜이 파국으로 치닫자 안나는 ‘불안하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그것이 이성이 있는 이유다. 그래, 생의 촛불을 끄자. 그녀는 브론스키를 벌하고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철로에 몸을 뉘인다. 브론스키의 모친은 ‘무서운 정열’로 유명했던 그 여자가 ‘자기를 망치고 두 훌륭한 남자를, 자기의 남편과 나의 불행한 아들까지 망쳐버렸다.’고 한탄한다. 이제 브론스키는 상처를 안고 전쟁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대 오스만제국 전쟁을 위해 수많은 러시아인 의용군이 기차역에 모였다. 오늘도 내일도 기차는 군인들을 전쟁터로 출발한다. 기차는 폭력과 파괴를 실어나른다.
사람들은 기차가 지옥이고, 괴물이라는 이미지를 갖곤 했다. 에밀 졸라는 거대한 에펠탑이나 기차에 놀라 ‘진보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인간 짐승’(1890)은 무서운 소설이다. 에밀 졸라가 왜 이런 소설을 썼을지 궁금했다. 애욕이나 본능에 관한 이야기일까. 혹시 인간 문명에 묵시록적인 경고를 동반한 작품은 아닐까.
뜨겁고 검고 빠른 증기 기관차. 거기에 소음, 매연 색과 크기 등을 덧붙여 보자. 이 괴물은 에로스를 자극해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부른다. 석탄을 때서 물을 증기로 바꾼다. 에너지가 고도로 집중되면서 극도의 흥분이 나타났다가 수증기와 재로 사라진다. 무로의 환원이다. 쾌락과 죽음이 번갈아 찾아온다.
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는 유전과 환경의 영향에 대한 보고서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사회, 경제, 과학 제 분야에서 바뀌는 것이 많았다. 빠르고 크고 거센 것들이 등장했다. 그는 이 20권의 과학 소설에서 인간과 문명의 관계를 묻는다. '인간 짐승'은 이 총서의 17번째 작품이다. 작가는 현대의 가공할 힘이 병과 범죄도 동반하리라는 걸 암시한다.
자크는 열차 기관사다. 그는 여자를 갈망한다. 살인해서 죽일 정도. 그 충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는 '나쁜 피'를 자각해 될 수 있는 대로 여자를 피해 왔다. 조상이 남 죽이기를 밥 먹듯 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타인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걸 피는 저절로 안다. 소시오패스 본능은 예의와 염치, 사회 교육으로 잠시 몸을 감춘다. 그러나 강렬한 소리와 힘, 빛이 내부의 짐승을 깨운다. 어느 날, 봉인된 잠에서 깨어 몸 밖으로 나온 이 짐승은 진짜 주인으로 군림한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던가? 그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순간 파리발 급행열차가 그가 발을 딛고 있는 방바닥이 뒤흔들릴 정도로 세차고 빠르게 지나갔다. 숨이 끊어진 그녀는 그 폭풍에 휩쓸려 즉사한 것처럼 보였다.
살육의 현장 한복판에 풀어놓은 눈멀고 귀먹은 한 마리 짐승처럼 기관차는 이미 피곤에 절고 술에 취해 혼곤한 상태에서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병사들을 싣고, 그 총알받이들을 싣고 달리고 또 달렸다.
이 소설에는 20명 이상의 죽음이 그려진다. 기차 전복 사고, 복수, 애욕, 부도덕으로 인한 죽음이 섞인다. 이유라고는 전혀 없는 죽임과 죽음도 있다. 인간 짐승에 의한 충동적 살인이다. 죽음을 향한 그 본능은 주인공의 죽음으로야 종결된다. 자크를 산산조각 낸 기차는 희생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전진한다. 보불전쟁에 참전하는 ‘총알받이’들을 실은 채로.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1908)는 배짱 없는 촌놈, 산시로의 성장소설이다. 산시로의 주변에는 몇몇 세계가 있다. 고향 구마모토현, 대학 학문의 세계, 그리고 도쿄라는 신세계. 산시로는 과거가 숨 쉬는 고향으로 가고 싶지 않다. 술, 재미있는 이야기, 그리고 여자가 있는 도쿄, 그곳이 제일 관심있다. 그는 이곳에서 미네코라는 여자에게 반한다. 그녀는 도회적인 여성, 신세계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는 여자의 의도를 헤아릴 수 없다. 도쿄는 그런 곳이다. 얼마나 다가가기 어려운지. 그는 어느 날 밤 철길 부근에서 어떤 여자의 탄식을 듣는다. 곧이어 기차가 지나간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무참하게 훼손된 젊은 여성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그 얼굴과 “아아”하는 힘없는 목소리, 그리고 그 둘 안에 숨어 있을 무참한 운명을 연결시켜 생각해 보니 인생이라는 튼튼해 보이는 생명의 뿌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느슨해져 언제든지 어둠 속에 떠오를 것 같았다. 산시로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을 만큼 무서웠다. 그저 꽝 하는 한순간이다. 그전까지는 살아 있었다.
한 여자가 삶을 내려놓았다. 현대와 도시, 신문물은 순식간에 생명을 앗아갔다. 시골 청년은 깊은 충격을 받는다. 더 무서운 건 호기심으로만 그 죽음을 대하는 주변인들의 태도이다. 도시는 그런 곳이다. '봄처럼 찬연'하지만 아름답지만은 않다. 도쿄 여자 미네코는 산시로를 은근히 유혹하지만 결혼은 다른 남자와 한다. 그녀는 산시로에게 '스트레이 십'(길 잃은 양)이라는 말을 남긴다. 미네코는 자기가 딛고 선 삶에 적응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시골 남자를 영악하게 알아본다.
자연을 벗어난 빛, 에너지, 속도에 공포를 느꼈던 옛날 사람들처럼 나도 많이 혼란스럽다. 1910년대 '미래주의' 사람들처럼 새 조류에 도취해서 같이 춤추는 게 더 나을지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