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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Apr 24. 2023

단지 우연

게르하르트 리히터, 한 가족의 드라마, 작가미상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는 독일 출신으로 예술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작가다. 그럼에도 리히터의 작품을 보면 깊은 공허의 늪에 빠진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세상의 구심점에 있다고 자신한다면 쾌락과 향연을 즐길 만도 한데 그의 작품들은 그렇지 않다. 그는 할 말이 없다고 크게 말하는 사람같다.


리히터의 작품은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들을 연상하게 한다. 힘이 역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 다를 뿐 거세기는 마찬가지다. 프리드리히는 세상에의 경탄을 외친다. 폐허 앞에서도 그 경건함, 단단함은 변함없다. 반면 리히터는 희미해지는 세계 앞에 서서 해체를 목격하고 기록한다. 그는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일찍이 안전을 빼앗긴 회의주의자’의 시선을 지녔다. 혼돈과 무에 사로잡혀서. 그래서 작품은 위험하고 비관적이지만 진실하다.      


리히터의 집안을 다룬 ‘한 가족의 드라마’(2005)를 읽은 적이 있었다. 위르겐 슈라이버라는 기자가 리히터의 집안을 깊숙하게 들여다본 르포르타주 형식의 글로 독일 나치의 죄와 벌을 다룬 글이다. 책은 잿더미가 된 드레스덴으로부터 시작한다. 히틀러가 ‘국가사회주의가 그 도시에 제대로 된 모습을 부여할 것’이라고 축복한 도시였으니 연합군 폭격의 대상에 포함되기도 쉬웠다. 1945년 2월 14일 하루 수만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드레스덴은 파괴된 건물과 잿더미로 뒤덮인다. 어떤 작가는 ‘꿈속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지나가는 것처럼 이 도시를 지나간다’고 썼다. 이런 감정은 쉽게 치유될 수 없다. 13살 소년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할 충격적 인상을 받았다. 그는 ‘죽음과 함께 삶은 시작되었고 재난 속에 태어난 세대의 운명 자각한다.      


독일영화 ‘작가 미상’(2018)은 ‘한 가족의 드라마’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보인다. 영화는 리히터가 동독을 탈출해 쿤스트아카데미 뒤셀도르프를 졸업하고 서독에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얻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리히터는 이때까지의 삶을 통해 ‘개인적 견해가 없는 상태, 진술 거부, 침묵’이라는 특성을 갖게 된 거 아닐까. 그런 면에서 ‘Never Look Away’라는 원제 대신 ‘작가 미상’이라는 한국어 제목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리히터가 추구하는 삶을 가리킨다고 본다.      








삶은 가혹하고 패배에 익숙하게 한다. 어린 리히터는 외가와 친하게 지냈다. 독일군이었던 외삼촌 두 명은 전쟁터에서 죽었다. 정신 분열을 앓던 마리안네 이모는 나치에 의해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불임수술을 받고 결국 안락사로 삶을 마감한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희생당한 5000명의 정신병동 안락사 희생자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사망한 후 자살했다. 연속되는 불행은 리히터를 주변인으로 인식하게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의 첫 아내 엠마는 하인리히 오이핑어라는 의사의 딸이었다. ‘계단 위의 나부’(1966)의 그녀다. 리히터는 그녀에게 푹 빠져 장인의 경멸도 꾹 참고 버텼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는 장인이 마리안네 이모의 정신병동 불임 수술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나치 친위 장교 오이핑어는 우생학에의 신념을 가진 인물이며 국가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주도하는 정책에 헌신적이었다. 패전 후 시베리아로 끌려간 친위대가 많았으나 오이핑어는 의사가 모자란 탓에 면죄부를 받고 석방된다. 곧이어 그는 친스탈린주의자로 탈바꿈해 동독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나치에 봉사한 이 인물은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자본주의자로서 불사조 같은 삶을 보냈다.  


이 일은 자칫 묻힐 뻔했다. 심지어 오이핑어는 1988년 94세로 죽은 후에는 많은 이들의 애도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유산도 통독 후에 자녀들에게 온전히 상속되었다. 다만 어쩌다가 리히터의 장인이 된 탓에 책의 주요 인물로서 그 행적이 전 세계에 샅샅이 공개되었다. 물론 죽은 후이니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 ‘삶의 총체적 기이함’을 보여준 인물이었다고나 할까.     


리히터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있기 직전에 동독을 탈출한다. 학교에서도 부르주아식 그림을 그린다고 비판을 받곤 했으니 사회주의에 신물이 나 있는 상태였다. 이런 체제에서는 어떤 존재도 될 수 없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는 오히려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을 신봉하고자 마음먹었다.

     

당연하지만 리히터의 동독 시절 작품은 많지 않다. 학교와 당국은 몇몇 남은 의 작품마저 덮어 그려 탈주자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다. 동독 시절의 리히터는 ‘수다스럽고, 호기심 많고, 뻐기기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오래된 리히터의 사진을 보면 그럴 법하게 느껴진다. 1950년대의 리히터는 제임스 딘이나 말론 브란도처럼 반항적 매력이 돋보인다. 여자들은 리히터를, 리히터는 여자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오이핑어 때문에 탈독 이후에도 구설수에 올랐다고 한다. 3제국의 거물 의사를 장인으로 두었기에 동독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서독으로 갔다는 소문이었다.     


1956년 리히터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4인의 가족’(1956)에 오이핑어 가족을 그렸다. 1966년에도 장인을 그렸다. 물론 오이핑어의 전력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3제국은 전후 세대에게 금기였다. 리히터도 자신은 나치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이핑어의 전쟁 시절 행적도 의도적으로 무시했음이 분명하다. 사람들에게는 탈현실이 필요했다.      


1960년대 리히터는 앙포르멜 추상화를 벗어나 팝아트 계열 포토 리얼리즘에 관심이 많았다. 가족들의 스냅사진들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동독에서 배운 기술일까. 1971~1972에 그린 포토리얼리즘 기법으로 그린 ‘48인의 초상화’는 사진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극사실적인 작품 목록이다. 신문, 잡지 등에서 얻은 사진들을 기반으로 했다. 이때부터 차츰 리히터의 개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누가 찍었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지지도 않은 우연히 얻은 사진들이 그림의 재료가 된다. 주제는 무중력 상태, 부재, 소외, 몰락한 과거다. 삶은 ‘불확실한 행운의 변증법’으로 가득하다. 그리기로 한 사진들은 어느 한순간 작가의 심정을 건드렸을 것이다.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비정치적 사건들, 희생자이자 가해자였던 가족들을 화폭에 채웠다. 체코의 리디체 마을은 1942년 '프라하의 도살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 남자 200명이 처형당한 곳이다. 리히터는 자신의 외삼촌, 독일군 외투를 입은 ‘루디 삼촌’(1965)를 마을에 기증했다. 루디는 장난기 있는 평범한 남자였지만 독일군이었고 연합군에 저격당해 죽었다. 비정치를 통해 정치적 목소리를 냈다는 생각이다. 그의 작품들은 곧 파괴, 상실, 책, 죽음, 공포, 희망, 탄생, 덧없음, 종말 등으로 해석되었다.        


이 시절 그가 그린 인물들은 풍경과 구별되지 않으려 한다. 인물의 외곽선은 배경에 파묻혀 잠식된다. 블러blur 터치로 사물을 처리했다. 초점없이 흐릿하게 번지게 하는 기법으로 외부 세계에 휩쓸리는 내면을 표현한다. 리히터는 두드러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사회를 겪고 겨우 자리 잡은 사회에서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기만 했다. 겉으로는 인상주의적 수법 같지만 작가는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 광학을 실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붕괴를 드러내려는 작품 같다. 그가 그린 ‘하이더 씨’(1965)는 놀랍도록 오이핑거를 연상시킨다. 나치 안락사 최고 판정관이었던 이 인물은 전쟁 후에도 서독에서 가명으로 활동했다. 그의 정체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그의 이중생활도 끝났다. 하이데는 체포되었고 신문에 사진이 실렸다. 리히터는 ‘1959년 11월 경찰에 출두하는 베르너 하이데’블러 방식으그렸다. 하이데는 1964년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한다.       


1980~1990년대의 초와 해골 시리즈도 이런 흐릿한 이미지의 연속이다. 메멘토 모리와 같은 정물화 전통을 담았다. 프레임 내부는 양초가 은은하게 불을 밝힌다. 작품의 테마는 뭘까. 촛불일까, 빛일까. 주제마저 흡수한 채로 사물과 빛은 서로를 넘나들며 추상화의 길목으로 접어든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Skull with Candle(1995)





작가의 본격 추상화는 폭포수처럼 거대하다. 긁개로 물감을 바르고 지우고 밀기를 반복했다. 아름다움에의 모호한 환상일까. 휩쓸려 내려가는 수많은 레이어를 가진 세로 기둥들이 펼쳐진다. 이 미묘한 색채는 무언가를 의미할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힐끗보기, 섬광. 빠르게 지나쳐간 삶이든지 창밖을 스치는 풍경일 것도 같다. 무자비하게 휩쓸고 가는 시간은 또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혼돈과 무를 회화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가장 인상적인 작품 목록은 '컬러 차트 페인팅'이다. 그는 이미 1960년대 중반부터 이 실험을 거듭해 왔다. 2007년에는 72개의 색 11,500개의 유리패널로 쾰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도 장식했다. 컴퓨터 프로그램에 따라 임의로 조합한 무한 복잡 체계다. 이 연작에서는 사각형 색깔 차트들을 어떤 식으로 조합해도 가능할 테니. 어린아이들이라면 리히터의 작품일지라도 겁내지 않고 그 순서를 마구 바꾸고 싶을 것이다. 만화경처럼 함부로 바뀌는 새 풍경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겠지. 그 변화는 즐겁고 기발하다. 아이들은 그걸 잘 안다. 그러나 어른들은 두렵다. 함부로 바뀌고 마는 삶의 변주곡 앞에서 사람들은 공포감마저  갖는다.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리히터는 자신을 '타고난 보수', '터무니없는 구식'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보수적이기도 불가능했으리라. 중심도 없고 지킬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리히터의 그림에는 최대 우연, 최소 운명이라는 거대한 주제가 어른거린다. 개인이나 사회는 그 무작위성에 비극적으로 흔들린다. 심오하게 내려다보는 눈이 있다면 기기묘묘한 이 복잡한 무늬를 알아채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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