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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김 Aug 17. 2021

흔적 남기기

오로지 나를 위해서 하는 기록에 대해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와 <패터슨>의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2017년, 아직은 긴팔 셔츠를 입고 다닐 수는 있지만 외투를 입기에는 조금 답답한 온도의, 여름의 정취가 아직 가시지 않은 적당한 가을의 월요일이었다. 그날 나는 아주 이른 오전에 학교에 다녀왔고, 오후에는 노트북을 들고 집 근처 스타벅스에 가서 과제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노트북에 휴대폰을 연결해서 충전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무런 예고 없이 휴대폰 전원이 꺼져 버렸다. 다시 켜질 거라 생각하며 전원 버튼을 계속 눌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3년 정도밖에 쓰지 못한 휴대폰이 고장나버렸다. 나는 나에게 이유를 설명해주지도 않고 죽어버린 휴대폰을 살려보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휴대폰이 고장이 나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학을 합격한 이후에 2015년부터 차곡차곡 찍어서 모아 온 사진들 때문이었는데, 3만 장이 넘는 꽤 많은 양의 사진과 비디오가 하루아침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사진들 중에는 부모님과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며 찍은 사진들, 대학생 시절의 나와 친구들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사진들, 그리고 사촌동생이 태어난 뒤에 커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있었는데, 그렇게 내게는 너무 소중했던 삶의 흔적들이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삭제된 사진들만큼의 기억마저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던 그날 저녁 상실감을 느끼며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다.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다 보면 오랫동안 완전히 잊고 있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때가 있다. 나의 과거 속 한 장면을 담은 사진을 보면, 그 사진을 찍었을 당시뿐만 아니라 그렇게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카메라로 찍지 않았지만 나만의 렌즈가 포착할 수 있었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그 사진들에는 그때의 냄새가 배어있고, 그때의 소리가 스며들어있다. 오랜만에 들춰본 사진 한 장을 통해 그날의 전체의 분위기와 이야기를 다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들 하는데 정말인 것 같다. 찍었던 사진들을 잃어버리면 당시의 기억도 슬슬 잊어버리게 된다. 사진을 찍는 것은 내가 기억을 잊어도 내가 겪은 일들이 정말 일어났다는 것을 언제든지 증명해내기 위한 행위인 것 같다. 나는 지난 3년 동안의 좋은 기억과 경험들을 시각적으로 증명해낼 보증수표를 빼앗겨버렸다. 그동안 작은 화면 안에 담아둔 삶의 순간들의 기록을 모조리 잊어버린 나는 그 흐릿해져 가는 추억들을 상상 속에서나마 겨우 더듬어볼 수 있게 되었다.



카메라 렌즈로, 펜으로, 키보드로 우리는 어떻게든 무언가를 계속 남기려고 한다. 가끔 그 강박은 기록의 참된 목적을 잊게 한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그것을 나중에 다시 읽고 기억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일어난 일을 내면의 창고에 던져둔 뒤 마음껏 잊어버리기 위해서 일기를 쓸 때가 더 많다. 공연을 보러 간 날에는 실제 무대 위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담기보다도 카메라로 담기 위해 추켜올린 휴대폰 화면을 통과하는 작디작은 영상을 더 많이 보고 오기도 한다. 또 여행을 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게 되면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온몸으로 느끼기 보다도 그 앞에서 사진을 찍기에 급급할 때도 있다. 이렇게 방향성을 잃은 기록은 결국 내가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기억하게 하지 않고 글자와 이미지로 왜곡되어 남겨진 잔상만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할 뿐이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더 좋은 상품으로 보이게끔 포장하고 홍보해야 하는 요즘에는, 나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시작한 기록 습관마저도 결국에는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물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분명 그러한 시선에서 자유로운, 오로지 나 혼자만을 위한 기록 작업에는 그 중압감에서 벗어난 편안한 진심이 배어있기 마련이다.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의 발명과 보급 이후 우리의 세계는 거대한 이미지의 무덤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인간이 카메라로 만들어낸 이미지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언덕을 이루었지만, 우리는 그 무덤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또 새로운 무덤을 쌓기 위해 셔터를 누른다. 이 무덤들 중에 특히 비비안 마이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이 쌓아온 기록의 무덤은 꽤 흥미롭다. 이 낯선 미국인 여성은 사후 몇 년 뒤에야 사진작가로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죽기 전까지 그의 주변 인물들은 오로지 그를 아이들을 돌보는 '유모'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고, 그 누구도 그가 사진을 찍는, 게다가 매우 잘 찍는 예술가였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존 말루프의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Finding Vivian Maier)>는 이 평범하고 비밀스러운 여성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의 인생이 남긴 수많은 기록물들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생전에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드러내는 마인드맵을 천천히 그려나간다. 비비안이 죽은 뒤에 아무도 찾지 않은 그의 유품들이 보관된 창고에는 그가 평생 살면서 모아 온 엄청난 양의 액세서리, 옷, 영수증, 신문, 노트, 녹음테이프 등의 온갖 잡동사니가 비비안의 인생을 조용히 증명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된 현상되지 않은 수백 개의 필름들이 비로소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한 것인데, 그 필름들에 담긴 수천 장의 사진들은 그가 아마추어 사 진작 가였다고는 도무지 믿기 힘들 정도로 전문적이고, 아무나 따라 하지 못할 독보적인 예술성이 담겨있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는 낡은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자신만의 예민한 감각으로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을 프레임에 담아 가며 은밀하게 예술가로 살다 간 사람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롤라이플렉스에 담는 비비안 마이어


비비안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자신이 돌보는 아이들을 찍었고, 길거리에서 무작정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 사진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며 거리의 사람들을 담아냈다. 길을 걷다 거울이나 쇼윈도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담았고, 거리에서 마주하는 위트 있는 상황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포착해냈다. 그의 사진들을 보다 보면 거의 그가 살았던 시대의 분위기를 여과 없이 담아낸 보도 사진을 보는 듯한 생생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떻게 한 사람이 평생 이렇게나 많은 사진을 찍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비비안은 말 그대로 숨 쉬듯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들을 보고 유명 사진작가들은 물론 미술관 관장들이나 예술 평론가들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정작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수많은 사진들을 제대로 인화를 하거나 세상에 공개하지도 않았다. 그가 내심 유명 작가가 되고 싶어 했을지, 아니면 정말 오로지 취미로만 사진을 찍었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비비안은 생전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아주 비밀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그의 지인들의 증언만으로는 그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다 (대부분은 그를 괴짜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습관처럼 찍은 비비안의 수많은 사진들은 분명 그만이 갖고 있던, 타인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따뜻한 시선과, 주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민첩함을 증명해낸다. 비비안 마이어는 사진만으로 그것을 찍은 사람의 가치관과 삶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독서 행위인지를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인물이다.


죽을 때까지 결국 아무에게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사진들을 찍는 동안 비비안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발견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냐마는, 왠지 모르게 비비안이 유명한 사진작가가 되겠다는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2021년의 오늘 우리가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할만한 사진을 어떻게든 잘 찍어보려고 하는 것처럼, 자신이 마주하는 일상의 순간들을 타고난 예술 감각을 반영하여 프레임에 잘 담아 간직해두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 오로지 본인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서 셔터를 눌렀을 수많은 순간들이 비비안에게 선사했을 자유로움을 함께 느끼는 기분이 든다. 고용주의 집의 단칸방에서 유모로 살았고, 주변인들에게 딱히 좋은 인상을 남긴 사람은 아니었던 비비안은 조금은 고독한 인생을 살다 갔을 것이다. 게다가 그를 묘사하는 말들과 그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예민한 감각을 갖춘 사람이었을지 짐작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성향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보편적 타인이 공감해주지 못하는 상황을 자주 마주하면서 다른 이들보다 천성적으로 외로움을 더 많이 느끼기 마련이다. 비비안은 그 깊은 고독을 해소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벗 삼아 셔터를 계속 눌렀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외로웠던 만큼 자신이 보는 세상을 더욱더 자주 기록하고, 자신이 이렇게 세상에서 존재감을 내비치며 살다 갔다는 흔적을 어떤 방식으로든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수집광 비비안이 평생 모아 온 인생의 장면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습관적 흔적 남기기'의 결과물이다.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를 보고 나니 문득 떠오르는 가상의 인물이 있다. <패터슨>은 짐 자무쉬 감독 작품으로, <미스터리 트레인>,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지상의 밤>과 같은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하지만 그렇다고 무심하지는 않은 감독 특유의 아이러닉 한 시선이 담겨있는 영화이다.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하는 주인공 '패터슨'은 뉴저지 주 패터슨 시에서 살아가는 아주 평범한 버스 운전기사로, 매일 같은 정류장들을 지나다니는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따분해 보이는 그의 하루에도 역시 '즐거운 균열'이 있다. 그는 매일 아침 버스를 운행하기 전에 운전대에 노트를 대고 시를 쓰는 시인이다. 길을 걷다가도 시상을 떠올리며 틈틈이 시를 써 내려가는 그에게 시는 살아가는 이유이고, 따분하고 반복되는 그의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만드는 자극제이다. 그는 자신이 매일 보고 느끼는 일상적인, '별 거 아닌' 것들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라는 프레임 안에 자신의 시상을 유려하게 담아낸다. 그의 아내는 그렇게 써둔 시들을 제대로 출판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남편을 설득한다. 지하 작업실에만 썩혀 있기에는 이 아름다운 시들이 너무 아깝지 않으냐고 말한다. 하지만 패터슨은 자신이 쓴 시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쓴 것은 아니라며 출판하기를 꺼려한다. 그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대단한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을 쏟아 붙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습관적으로 행하는 하루하루의 성실한 의식일 뿐이다. 그가 꿋꿋하게 매일 버스 운전대 위로 쌓아 올린 시의 운율은 묵직한 브레이크가 되어 그의 반복적인 삶에 제동을 걸고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똑같은 일상이 지속되던 와중에 패터슨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그가 잠시 아내와 외출을 하고 돌아오고 보니, 강아지 '마빈'이 그동안 그가 열심히 시를 써서 쌓아두었던 보물창고와도 같은 노트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이다.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마빈을 혼을 내거나 원망하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패터슨의 허탈한 눈빛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영화의 세계관이 <작은 아씨들> 속 세계관과 같았다면, 자신이 열심히 쓴 시나리오를 화풀이한답시고 불태워버린 여동생 '에이미'에게 노발대발 화를 내는 '조'처럼 패터슨도 마빈의 머리채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순진한 강아지에게 패터슨의 노트는 아무 의미도 없는 장난감일 뿐이다. 패터슨의 실망감은 다행히 오래가지 않는다. 그동안 모아 온 것이 없어졌다면, 다시 또 쓰기 시작하면 될 일이다. 그가 자신의 작업의 결과물들을 전리품처럼 여기지 않는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가 시집을 내고 유명한 시인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열심히 시를 쓰는 것이었다면 아마도 마빈을 똑같이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게 시는 시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위안과 행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다음 날에도 평소에 하던 대로 다시 펜을 잡고 그 습관을 이어나간다.


'패터슨'과 그의 미워할 수 없는 반려견 '마빈'

사람들은 각자에게 맞는 방식대로 자신의 역사를 남기려 한다.  역시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어떻게든 '' 주제로 하는 흔적들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종이 노트에 일기를 쓰면서 하루 동안 느낀 온갖 감정들을 털어낼 때도 있고, 아이폰 메모장에 다음  해야  일들을 구체적으로 계획해서 적어두고,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 평점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가서 평가를 남기면서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 기록해둔다.  책을 읽은 뒤에는 인상적인 구절이 담긴 페이지를 찍어서 개인 SNS 남겨두기도 한다. 길을 걷다 좋은 장면을 보면 카메라로 어 (평소에는 자주 보지 않을) 사진첩에 담아둔다. 렇게 차곡차곡 저장해둔 기록들은 사실  내용을 마음껏 잊어버릴 게으른 목적으로 남겨둔 것들이라 그런지 이후에는 그것들의 세부적인 디테일은 기억을  못할 때가 많다.  기록물들을  살펴보면 어떤 것들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것들이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타인을 의식하고 누군가에게 공유하고 싶기 때문에 남겨두는 것들이기도 하다 (지금 끄적이는 글도 물론 이런 목적을 갖고 쓰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렇게 무언가를 남겨두고 적어둠으로써 그 과정과 결과물로부터 분명 어떤 위안을 느낄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기록은 자기애를 실천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방법이다. 방식이 어떻든 나와 대화를 하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면 밖으로도 따뜻한 시선과 사랑을 표출하기가 쉽지 않다. 비비안은 자신의 셔터를 누르며, 패터슨은 펜으로 휘갈기며 자신과의 대화를 이끌어 나갔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아도  기록들에 담긴, 내가  자신에게 고백하는 은밀하고 자유로운 진심만큼 더욱 소중한 것은 없. 그러한 기록을 남기는 시간은, 억지로 포장하지 않은 알맹이를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키워나가는 여행의 시간과도 같다.  알맹이는  속에 있는 것이라 누가 훔쳐갈  없다.  알맹이는 자기애의 얼굴을 하고 있다. 온전히 나의 평온과 만족감만을 위해 매일매일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더라도  자체로 비밀스러운 예술이 되는 것이고,  개인의 일상적인 삶에 즐거운 균열을 내어  진동을 이어가는 행위이다. 그러니 세상 언제 어디에서나 나를 포함한  누군가는 계속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계속 글을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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