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도시인처럼>을 보며
팬데믹이 유행하기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예전만큼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요즘에는 누구나 가슴속에 비행기를 타고 훌쩍 자유를 찾아 떠나는, 이제는 거의 불가능한 슬픈 꿈을 품고 있다. 여행 전에 계획을 세우며 정해진 예산과 기싸움을 하는 것, 좁고 불편한 비행기 안에서 잠결에 형편없는 기내식을 입안에 욱여넣는 것,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엘리베이터 없는 숙소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과 같은 여행의 불편했던 추억마저도 그리운 요즘이다. 코로나 시대의 필수품과도 같은 넷플릭스의 화면 속, 마르고 닳도록 돌려본 지겨운 영상들 사이에 낯선 다큐멘터리가 새로운 자리를 텄다. 이것은 각 30분짜리, 총 7편으로 구성된, 불과 며칠 전에 공개된 따끈따끈한 여행 다큐멘터리 미니시리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명확하게 ‘여행 다큐멘터리’로 분류될 만한 것은 딱히 아니다. 그저 내가 느끼기에 그렇게 불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인데, 이는 날카로운 지성과 신랄한 위트로 온몸을 꽉 채운 미국의 한 여성의 말을 통해 뉴욕을, 그리고 그녀가 살아온 개인적이고 지극히 미국적인 역사의 흔적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사람 여행’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제목은 <도시인처럼>. 원제는 조금 더 흥미롭다. <Pretend It’s a City>.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이 프로그램의 제작과 연출을 맡았고, 그 역시 이탈리아 이민자 2세 출신의 뉴욕 토박이다. 마틴 스콜세지는 <순수의 시대>, <셔터 아일랜드>, <아이리쉬 맨> 등의 많은 작품을 감독했지만 비틀스, 특히 조지 해리슨의 팬인 내게는 유독 <조지 해리슨 : 물질세계에서의 삶>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조지 해리슨의 음악 철학과 삶에 대한 태도를 더 깊이 있게 알게 되었고 결국 그를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스콜세지 감독의 저력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자신이 애정을 갖고 조명하는 사람을 결국 다른 모든 사람들도 사랑하게 만드는 능력. 그래서인지 스콜세지 감독의 다큐멘터리 작품들은 왠지 더 신뢰하고 싶어 진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누구에게 시선을 옮긴 걸까. 주인공은 미국의 작가이자 비평가인 프랜 리보위츠 (Fran Lebowitz), 그리고 뉴욕이다. 프랜 리보위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리보위츠면 왠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진작가 애니 레보비츠 (Annie Leibovitz)와 가족관계라도 되는 건가 싶어서 구글링을 해보았으나 둘은 이름도 핏줄도 전혀 다른 사람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다룬 영상을 본지 약 4시간 만에 나는 이 낯선 뉴요커에 완전히 중독되어 버렸다.
부스스한 것 같으면서도 정돈된 단발 곱슬머리에 둥근 안경, 빳빳한 셔츠에 매달은 커프스, 얇은 체크무늬의 두툼한 재킷, 청바지 속에 숨은 갈색 카우보이 롱부츠, 각 잡힌 코트에 스카프, 그리고 무심하게 왼쪽 주머니에 넣어둔 노란 장갑까지. 직설적인 비평가이자 휴머리스트인 프랜은 패션 스타일에서마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긴다. 그는 조금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너무 빠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느리지도 않은, 어쩌면 도시인에게는 적절하지 않을 속도의 걸음걸이로 뉴욕의 거리를 걸어간다. 그는 휴대폰 화면만 내려다보며 걷는 다른 뉴요커들과는 다르게 정면을 응시한다. 도서관 앞 도로 바닥에 새겨진, 아무도 안 읽는 명언 사인들도 프랜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도 빠짐없이 꼼꼼히 읽는다. 모든 것이 빨라야 하는 대도시에서 그는 자신만의 속도를 갖추고 살아가는 것이다. 1970년대부터 뉴욕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도시의 역사를 오랫동안 목격해온 프랜에게 뉴욕은, 근처 세탁소에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러 가는 동안에도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 리 없는 드라마틱하고 성가신 도시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프랜의 심기를 건드는 뉴욕이지만, 정작 시니컬한 목소리로 뉴욕 생활을 묘사하는 그의 말투에는 삐걱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제자리에서 굳건히 버텨내는 미묘한 애정이 묻어있다. 그것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없이 누구나 느낄 법한 감정이 아닐까 싶다. 내가 평생 살아온 서울이 싫고 답답해서 떠나고 싶다고 매번 생각해왔지만 사실 더 파헤쳐보면 줄곧 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이곳에서의 나의 일상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아니면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 크리스틴이 따분한 고향 새크라멘토에서 벗어나려고 고군분투하여 떠나온 뉴욕에서 결국 자신이 누구보다도 고향을 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과 같은, 그런 도시인의 숙명과도 같은 애증 말이다. 그리고 역시 누구보다도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며 아끼고, 그렇기에 더더욱 뉴욕을 떠나지 못하는 뉴요커 프랜은 그 애증 섞인 불만을 가감 없이, 그러나 듣는 이가 피식 웃을 수밖에 없게끔 유쾌하고 명확하게 토로한다.
“뉴욕 사람들은 걷는 방법을 잊은 것 같아요.” 주변을 살피지 않고 도로를 누비는 사람들, 특히 어깨를 툭 치고 가고도 뒤를 돌아보거나 미안하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 지도를 보다 무작정 말을 걸어 길을 묻는 관광객들, 초록 불 사인이 켜졌는데도 사람들이 걸어가는 횡단보도를 휙 지나가버리는 차 운전자들과 같은 모든 무례한 도시인들. 모두 프랜이 극도로 싫어하지만 매일같이 거리에서 마주쳐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침을 날린다. “Pretend It’s a City, where there are other people, and pretend it’s a city where there are other people who are not here just sightseeing, who have to go to places.” ‘제발. 제발 이 도시에서 너네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척이라도 해봐. 이 도시가 다른 사람들도 함께 살아가는 곳인 척이라도 좀 해보라고.’ 프랜은 상식적인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다. 그의 이상적인 세상에서는 지하철역 재정비 공사를 위해 역을 몇 주간 닫는 것은 ‘개 모자이크’ 예술작품을 벽에 걸기 위해서가 아니라, 승객들이 이용하기에 불편하니까 정말 수리해야 할 부분들을 고치는 데에 세금을 쓰는 것이 되어야 한다. 버스 기사라면 당연히 도시의 지리에 대해 잘 아는 상태로 어느 승객이 무슨 정거장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해야 하며, 예술 작품 경매장에서는 ‘억’ 소리 나는 가격 그 자체에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의 가치에 기꺼이 박수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프랜은 1950년에 태어났다. 많다면 많은 나이지만 앞에 있는 상대가 누군지에 따라 젊게 느껴질 수 있는 나이이다. 그리고 프랜은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보이는 것을 달갑지 않아 하는 듯하다). 스포츠엔 관심이 없는 데다가 돈을 내고 합법적으로 싸움을 구경한다는 발상은 더더욱 싫어하는 프랜은 격투기 팬들이 넘볼만한 좋은 자리에서 무심하게 무하마드 알리의 전설적인 경기를 관람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다가도 선배 듀크 엘링턴의 말 한마디에는 벌벌 떨었다던 재즈 뮤지션 찰스 밍거스는 추수감사절에 프랜의 집에 초대되어 부엌에서 남은 칠면조까지 다 먹어 치운 뒤 프랜의 어머니에게 유명 재즈 뮤지션이 아니라 ‘잘 먹는 친구’로 인상을 남긴다. 20대에 뉴욕으로 터전을 옮겨 인터뷰 매거진에서 첫 일을 하면서 당시 뉴욕 컨템포러리 예술 현장에서 신으로 추앙받던 앤디 워홀과 아는 사이가 되기도 했고, 그가 입고 있는 셔츠에는 알렉산더 칼더의 손주를 통해 받은, 칼더가 직접 손수 제작한 커프스가 달려있다. 물론 동료 뉴요커 마틴 스콜세지와는 언제 처음 만났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전부터 친구였다. 프랜은 그렇게 온몸에 미국의 문화를 새겨가며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온 역사의 발자국만큼 그는 의견도, 불만도 참 많다. 그 말들을 불쾌하지 않고 공감할 수밖에 없게끔 프랜은 자신의 주변의 것들에 대해 표현하고 또 표현한다. 누군가가 뉴욕이 불편하면 떠나면 되지 않느냐고 그에게 묻는다 해도 프랜은 떠나지 않는다. 대신 ‘아무 일 일어나지 않고 편안한 시골 도시보다, 복잡하고 정신없는, 짜증스러운 일이 매 순간 일어나는 뉴욕에서의 삶이 진짜 고달픈 어른의 삶이지 않겠냐’고 유쾌하게 답한다. <도시인처럼>은 책은 도통 팔리지 않는 가판대가 즐비한 (프랜이 극도로 싫어하는) 타임스 스퀘어, 뉴욕 전경을 미니어처로 만든 작품을 전시하는 퀸즈 뮤지엄 내부, 뉴욕 공립도서관에서의 강연 장면, 뉴욕의 악명 높은 지하철역 내부와 같은, 뉴욕의 여러 가지 공간들을 구석구석 보여주며 보는 이들이 방구석에서 뉴욕 여행을 할 수 있게끔 한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을 정말 ‘뉴요커’가 되게 하는 것은, 도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영상보다는 대낮에 어둑한 ‘더 플레이어스 클럽’의 바에 앉아 마틴 스콜세지 (중간중간 뒷배경에서 터져 나오는 그의 웃음소리도 아주 유쾌하다)를 바라보며 풀어내는 프랜의 ‘뉴욕 이모저모’ 수다 장면들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렇게 넋 놓고 듣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는 뉴욕을 여행하는 것을 넘어서 프랜의 인생을 전부 여행하게 된다.
“Think before you speak. Read before you think.” 말하기 전에 생각하고, 생각하기 전에 읽어라.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적 있었던 이 구절 역시 프랜의 머릿속에서 나온 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태도임이 분명한데, 프랜은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어찌 보면 정석적인 과정을 거친 지식인은 아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에 와서 일을 시작했고, 한때는 택시 기사 일을 하며 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유명한 다독 가이고, 집에 가득 쌓아둬도 공간이 모자랄 정도의 방대한 양의 책들을 갖고 있다. 날카로운 유머와 신랄한 통찰력을 모두 겸비한 그의 말 뒤에는 그만큼 많이 읽고 생각해온 수많은 지식의 흔적들이 줄 서있는 것이다. 그 과정을 거친 사람은 본인의 의견을 자신 있게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것에 대해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용기. 그 말들에는 자유로움이 깃들어있다. “제가 이래라저래라 참견해서 실제로 뭔가 달라진다면 사람들이 화내는 마음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바꿀 수 없으니까 화를 내는 거죠. 힘이 없다는 게 화가 나는 겁니다. 그래도 의견은 차고 넘치죠. The anger is, I have no power. But I’m filled with opinions.” 그는 뉴욕 시장도 아니고, 사회 운동가도 아니다. 부당하고 비상식적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은 여전히 그의 곁에서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 여성으로서, 그리고 동성애자로서, 그 두 가지 정체성 모두 주류가 될 수 없었던 시대를 버텨온 사람에게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내뱉지 못하는 응어리가 맺혔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관찰하고 느끼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분명히, 그리고 매우 유쾌하게 반응하고 표현한다. 냉소적인 위트가 담긴 그의 논평에는 많이 읽고 많이 경험한 단단한 사람의 진심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진심을 듣는 이들은 정중히 경청할 수밖에 없게 된다. 분명 우리 주변에는 이런 여성상이 더욱더 많아져야 한다. 내가 이 즐거운 간접 뉴욕 여행으로부터 얻은 것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프랜 리보위츠라는 자신감 넘치고 강한, 그리고 줄곧 되기를 꿈꿔왔던 이상적인 지식인 여성 롤모델이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타입의 사람. 너무나 명민한 위트를 갖춘 이렇게나 멋진 사람 한 명을 더 알아가게 되었으니, 이 짧은 방구석 뉴욕 여행 참 유익했다.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를 정말 좋아한다. <유브 갓 메일>에서 주인공 캐슬린이 운영하는 아동 서적 전문 서점의 아늑함, 패티 스미스의 책 <저스트 키즈>에서 묘사된, 패티와 로버트 메이플소프를 비롯한 6-70년대 뉴욕의 예술가들과 그들의 열정이 모여든 첼시 호텔의 뜨거움, <맨해튼 미스터리>에서 아내를 죽인 것 같다며 이웃 주민을 의심하고 미행하는 다이앤 키튼의 엉뚱한 일탈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쾌함, <프란시스 하>의 흑백 장면의 건조함 속에서 ‘내 공간’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프란시스의 열정적인 허무함까지. 뉴요커가 아닌 나에게마저도 뉴욕은 다양한 이미지로 연상되는, 익숙하고 애정을 주고 싶은 도시이다. 다큐멘터리를 다 보고 나면 프랜의 수다를 통해 뉴욕을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쭉 그와 함께 함께 살아온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약간의 짜증 섞인, 그렇지만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주변을 관찰하며 뉴욕 시내를 거니는 프랜의 모습을 보고 나면, 그가 묘사하는 뉴욕의 모습 한 스푼이 더 떠져 내 마음속에 담기는 것이다. 이 작품은 팬데믹 유행 이전에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프랜은 후에 뉴욕 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그저 뉴욕과 도시 삶에 대해 불평했을 뿐이었는데, 팬데믹 이후에는 이 프로그램이 일종의 뉴욕에 헌정하는 러브레터와도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오늘도 미국에서는 22만여 명이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 판정을 받았다. 1년 넘게 이어지는 이 불안한 시기에는 이전의 뉴욕, 그리고 이전의 우리의 일상의 모습도 다시 떠올리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어쩌다 보니 <도시인처럼>은 뉴욕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유작과 같은 형태로 남아버렸지만, 이것을 보며 우리의 '정상적인' 원래의 삶이 얼마나 다채롭고 활기찼는지 오랜만에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도시의 복잡함에 대해 불평하는 자유를 그리워하게 되기도 한다. 이 프랜 리보위츠의 조금 비뚤어지고 냉소적인 뉴욕 찬가는 우리가 이전에 만끽하던 자유로움을 간접적으로나마 다시 경험하게 하고,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새로운 사람에 대해 배워갈 수 있게 하고, 언젠가는 정상으로 돌아올 모든 것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희망을 갖게 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 일단 그냥 보기만 하면 된다. 프랜과 마주 보고 앉아서 암울한 시간을 버티게 해 줄 유쾌한 수다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