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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김 Sep 01. 2021

귀로 음미하는 마들렌

무언가가 유독 그리운 날 듣게 되는 어떤 음악



2018년, 스웨덴 남부의 작은 마을 벡훼에서 잠시 살던 시절을 종종 떠올린다. 벡훼 (Växjö)라는 단어의 뒷부분을 차지하는 단어는 Sjö, 스웨덴어로 호수를 뜻하는 말이다. 청정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호수들이 이 소도시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고, 운이 좋게도 나는 아름답고도 소박한 풍경을 머금은 '트루멘'이라는 이름의 호수 주위를 산책하며 스웨덴의 고요한 자연을 매일매일 만끽할 수 있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호수의 잔잔한 물결 소리, 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는 소리만 들어도 나의 몸과 마음 모든 구석이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기숙사에 짐을 던져 놓고 휴대폰과 에어팟만 주머니에 욱여넣고 호수로 기꺼이 달려나갔다. 혼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아무 생각 없이 호수 주위의 길을 한 바퀴, 가끔은 두 바퀴를 걸었다. 그러면서 마주치는 무뚝뚝한 얼굴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먼저 Hej!라는 인사를 건네면 그들이 Hej, Hej! 하고 활짝 웃으며 기꺼이 대답을 해줬다.


9월의 트루멘 호수


해가 일찍 지는 북유럽,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오후 3시만 되어도 슬슬 어둑한 기운이 하늘을 덮치기 시작한다. 파릇한 여름의 생기가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9월이 지나자 사뭇 분위기가 달라진, 깊은 인디고 색을 무심하게 덮은 호수는 내가 걸으면서 듣는 음악의 결을 바꿔 주었다. 활기찬 영국 인디밴드 음악이나 듣기만 해도 햇살이 피부에 닿는 듯한 느낌을 주는 캘리포니아 서프 록 음악을 들으며 힘차게 발을 내디뎠던 9월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오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차분한 비트에 두꺼운 베이스 소리를 곁든 모던 재즈 / 블루스 계열의 음악을 배경 삼아 천천히 걸었다. 이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음악은 푸마 블루 (Puma Blue)라는 프로젝트 명으로 활동하는 영국 뮤지션 제이콥 앨런 (Jacob Allen)의 <Blood Loss>라는 제목의 EP 수록곡들이었다. 두꺼운 색소폰 소리가 내려앉은, 블루스인지 R&B 인지 모던 록인지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을 듯한 그의 음악은 서늘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으로 가득하다. 그의 음악은 영하로 떨어진 날씨로 얼음장이 된 산책로 위에서도 마치 담요를 덮고 북 라이트를 비춘 아늑한 1인용 소파에 앉아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타이틀곡인 <Midnight Blue>나 <Lust>와 같은 노래들은 낮에 들어도 눈이 덮인 밤길을 유유자적이 걷는 느낌을 자아낸다. 여백으로 꽉 채워진 그의 음악을 들으며 보낸 낯선 곳에서의 혼자만의 시간 동안, 적막하고 건조한 공기 사이로 힘을 빼고 여유롭게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만큼 스웨덴의 소박한 분위기와 어울리는 목소리는 없을 것이라고 멋대로 정의를 내렸다. 3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음악을 들으면 그때 홀로 걸었던 겨울 호수의 차갑고 청량한 냄새가 나의 코 끝을 다시 찾는 듯하다. 살면서 가장 행복하고 평온했던 시기였기 때문인지, 마음이 심란하거나 위로를 받고 싶을 때마다 Puma Blue를 들으면 나의 머릿속에서 다시 북유럽으로 떠날 수 있게 된다.


차디찬 벡훼의 1월


특정 분위기와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을 때 이렇게 꼭 찾아 듣게 되는 음악이 있다. 음악 장르에 대한 취향이 꽤 확고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애플 뮤직에 올라온 나의 연도별 플레이리스트를 훑어보니 해마다 새로운 음악을 듣고 취향을 넓혀가고 있었던 것이 눈에 보였다. 이때는 이 음악에 빠져 있었구나, 이때는 이 뮤지션들을 제일 좋아했었구나. 나의 인생의 시기마다 깔린 배경음악들이 한눈에 보였다. 문득 유독 그리운 시기가 떠오르면 그 음악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한창 70-80년대 영국의 분위기에 취해 있었던 2017년의 나는 The Smiths, Cocteau Twins, Jesus and Mary Chain, The House of Love와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내가 겪어보지도 못했던 시기와 공간을 추억하곤 했다. 패티 스미스의 에세이 <저스트 키즈>를 읽고 나서부터는 로버트 메이플소프, 앤디 워홀, 벨벳 언더그라운드 & 니코, 밥 딜런과 같은 사람들이 활약했던 뉴욕의 60년대 예술 현장의 분위기에 심취해 있었다. 그때는 그에 걸맞게 60년대 특유의 기타 소리와 정취가 느껴지는 사이키델릭 록 음악을 찾아 들으며 상상에서나마 첼시 호텔에 모여있는 예술가들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이 시절에 들었던 음악은 꼭 지루함과 평범한 것들에서 벗어나길 갈망했던 대학시절의 나를 대변해 주는 것만 같다. 나는 그새 조금 자라고 성장했지만 2호선 지하철 안에서의 왕복 1시간을 채워준 나의 환상 속의 예술가들과 뮤지션들은 그때 나의 시간 안에서 여전히 머무르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분명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지만 재생 버튼 하나만으로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스웨덴에서의 여유가 그리울  Puma Blue 노래를 재생하고, 대학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날에 슈게이즈나 사이키델릭 록을 골라 듣는 것처럼, 어느샌가부터는 특정 순간에  어떤 음악을 들으면 좋겠다는 나름대로의 엄격하지 않은 기준이 생기기 시작했다. 날씨와 장소에 따라, 혹은 기분이나 시간에 따라 듣고 싶어지는 음악에 대한 나만의 사소한 습관들은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있는 동안 음악을 듣고 싶을 때가 생기면  잔잔한 앰비언트 음악을 골라서 듣는 . 눈이 오기 직전일  같지만 도통 하늘에서는 무언가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는 않는 서늘하고 흐린 날에는 시규어 로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걷는 . 비행기가 뜨는 순간에는 괜히 아케이드 파이어의 <Wake Up> 같은 감정이 북받치는 노래를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 랜덤 재생으로 플레이리스트의 음악을 듣는 것보다 훨씬   순간에 듣고 있는 음악에 집중하게 하고, 더불어 나의 주변의 풍경과 분위기에 더욱 빠져들게 해주는 이러한 소소한 의식들을 치르지 않게 되는 날에는 괜히 아쉬움이  커지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설계된 습관들 중 가장 즐기는 것 중 하나는 비 오는 날이 되면 라틴재즈를 재생하는 것이다. 다른 화창한 날에는 듣지 않고 무조건 비가 오는 날 듣기. 유독 비가 많이 쏟아졌던 2020년의 여름은 집에서 영화 <패왕별희>를 본 이후 한창 장국영 배우에 푹 빠져서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을 한 편씩 열심히 챙겨 보던 시기였다. 먹구름으로 어두워진 바깥을 비추는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빗소리를 배경 삼아 그가 출연했던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과 <해피 투게더>를 보고 난 뒤, 두 영화에서 각각 주된 사운드트랙으로 쓰인 하비에르 쿠가 (Xavier Cugat)나 아스토르 피아졸라 (Astor Piazolla)의 음악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아비정전>에 쓰인 하비에르 쿠가의 곡들은 영화 속 배경인 홍콩의 축축하고 습한 열기를 시원하게 식혀줄 것만 같은 분위기를 내뿜는다. 장국영이 춤을 추는 장면에 삽입되어 잘 알려진 <Maria Elena> 외에도, 장만옥과 유덕화가 결국 엇갈리게 되는 장면에서 흐르는 <Perfidia>,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의 <Jungle Drums>까지. 이 영화를 본 이후에는 열대 지방만의 공기와 잘 어울리는 쿠가의 음악을 비 오는 날 듣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오로지 빗소리만이 바깥 풍경을 꽉 채우던 여름날 새벽에 창문을 열어두고 그의 음악을 틀었는데, 아무도 다니지 않는 거리에서 빗방울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쿠가의 음악에 장단을 맞추며 춤을 추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비 오는 날에는 라틴재즈를


<아비정전>이 습기라면 <해피 투게더>는 열기 같다. <해피 투게더>의 분위기를 책임지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 역시 비 오는 날에 듣지 않을 수 없다. 통통 튀는 듯한 쿠가의 음악과는 다르게 피아졸라의 음악은 영화 안에서 차분하면서도 날카롭게 흘러가는데, 주인공 아휘와 보영이 사는 칙칙하고 서늘하면서도 정열적인 공간의 분위기를 극대화해준다. 허름한 공용 주방이 마치 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함께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Tango Apasionado>는 그들을 숨죽여 보는 이들 모두가 그들의 사랑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쿠가와 피아졸라, 그리고 그 외의 라틴재즈의 거장들의 음악을 한데 모아 만든 플레이리스트는 비 오는 날 빗소리와 같이 듣기 위해서 평소에는 재생하지 않고 아껴두는데, 덕분에 전에는 싫어하던 날씨를 이제는 기대하게 되었다.


사계절이 하루에 다 들어있는 것 같은 날씨의 런던에서 살면서도 비가 오는 날이 되면 잊지 않고 이 습관을 행하며 나의 2020년 여름이 가졌던 분위기를 재현해본다. 한국의 장마철이나 <아비정전>에서의 비 오는 밤의 홍콩만큼 비가 퍼붓지는 않지만, 런던이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흠뻑 젖는 날들 역시 묘하게 라틴재즈와 어울리는 듯하다. 런던에서 산 지는 벌써 5개월이 되어간다. 생각한 것보다는 런던에서의 삶이 서울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끔 대도시 서울 사람들의 어두운 낯빛을 런던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발견한다. 익숙함을 낯선 곳에서 마주치면서 더욱 이질적인 기분을 느끼다 보니 향수병이 생각보다 더 빨리 찾아왔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라곤 하지만 그래도 지하철 칸에는 동양인이라곤 나뿐일 때가 더 많다. 외국에 나오면 애국심이 더 커진다더니. 집이 그리워지고 서울의 풍경이 그리워져서 그런지, 조금이라도 고향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갈망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해외 음악을 열심히 찾아들었는데도 런던에서는 한국 노래를 더 자주 듣는다. 먼지투성이 런던 튜브 안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산울림의 노래를 들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소호 거리를 헤매는 동안 조용필의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를 들으면서 내 발자취를 런던 땅 한가운데에 남겨본다. 이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런던 생활의 사운드트랙을 하나하나 선곡하며 채워가는 중이다. 시간이 지나서 내가 영국을 떠나고 나면, 아이러니하게도 동물원의 노래를 들으며 이곳에서의 나의 삶을 추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의 어떤 구간들이 문득 떠오르고 그리워질 때, 언제든 내게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할 마들렌이 나의 귓가에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런던은 어떤 음악으로 기억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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