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싼타바버라 딸집에 간다고 자랑질 하는 친구 전화를 받고 풀이 죽어 있는데 홍콩에 있는 며느리로부터 카톡이 왔다. 아버님 비가 많이 온다는데 집에서 시원하게 지내세요 라는 문자였다. 그 말인즉은 별로 나갈 곳도 없을 테니 집에서 에어컨 빵빵 틀어 놓고 여름을 잘 지내라는 안부 인사다. 고맙긴 하지만 현실은 어디 그런가. 오늘 전국의 전력 소비량이 최고에 달할 거라는 뉴스에다 가산세니 누진세니 그런 내용도 들리는데 배짱 좋게 종일 에어컨 틀어놓고 여름을 보낼 수 있겠는가. 낮더위와 열대야 에 지쳐 흐리멍텅하고 후줄근해진 나는 더우면 에어컨 틀지 라는 마누라의 그 말만을 기다리며 훈훈한 바람만 날아오는 선풍기 앞에서 눈치만 보고 있는 처지인데 말이다. 홍콩은 종일 에어컨을 돌리는지 어딜 가나 시원해서 갈 때마다 그렇게 심한 더위를 느껴본 적은 없었고 쇼핑몰이나 호텔등은 오싹한 추위마저 느끼게 했다. 우리도 백화점이나 은행 등 그런 곳을 가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지만 오래 머물기도 거시기 한 데다 편하게 앉아서 쉴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아 노인들은 좀 멀긴하지만 널찍한 인천공항을 찾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륙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설레임을 느낄수 있는데다 지하철도 무료 이지만 열차안이 시원하기까지 하니 갈 곳이 마땅치 않은 노인들이 한여름을 보내기에는 최적의 장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 전 손주들을 바래다주러 인천공항을 다녀온 내 생각으로는 여름휴가 기간이라 공항이 번잡스럽기도 했지만 예전과 같이 그런 시원함도 못 느끼겠고 쉴 곳을 찾아간 노인들이 뭐라도 먹고 마시고 돌아오기엔 좀 벅찬 가격들이라 지금 그렇게 추천할만한 장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웬만큼 시원해서는 성에 차질 않지만 동남아시아 지역의 호텔이나 식당, 쇼핑몰 같은 곳의 냉방시설은 세계 최고라 인정한다. 습도가 적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던 난 여름만 되면 늘 그곳을 그리워한다. 에어컨도 없고 물론 선풍기도 흔치 않았던 시절 우린 한여름의 무더위를 어떻게 보냈을까 이젠 그 기억마저 가물가물 하다. 가끔 어머니가 사 오신 수박 속을 파내어 얼음을 넣고 설탕과 함께 속을 다시 채워 넣으면 지금 생각해도 천상의 맛이었고 전에 태국에서 자주 사 먹던 땡모반(수박주스)도 그 기억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원두막 앞에 모깃불을 피워 놓고 우물에 담가두었던 참외를 낫으로 깎아주던 학교 소사 아저씨, 우물물로 등목을 해주시던 외할머니의 손길이 떠오를 것만 같은 한여름 밤이다. 더운 홍콩에 살며 아이들에게 모든 정성을 쏟아붓고 있는 며느리, 날파리처럼 아주 작은데 모기처럼 피를 빠는 샌드플라이 (파리)에게 산채로 뜯기고 있다며 하소연하는 며느리를 생각하면 내가 느끼는 더위는 별거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이 또한 곧지나가리라는 최면을 걸어본다. 또한 더위를 피해 공원 나무 그늘 아래 박스를 깔고 누워버린 노인들, 부디 이더위 잘 버티시길 바라는 마음 전하고 나니 난 행복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