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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지프킴 Oct 28. 2021

고전(classic)이 고전인 이유

린디 효과, 낯설게 하기, 상상력..... 


여러분은 고전(classic), 하면 떠오르는 게 무엇인가요?

오래되고 낡고 어딘가 퀘퀘하고 고리타분한 지루함이 들 수도 있고,

동시에 전통 속에 소중하고도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도 들 법합니다.


저는 고전을 즐겨 읽고 듣고 보고 느낍니다. 

'클래식은 영원하고 트렌드는 일시적이라'고 진지하게 믿습니다.

나이는 이제 갓 서른인데, 무슨 나이에 맞지 않는 얘기를 하느냐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즐기기 시작한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오히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고전의 위대함"을 여실히 느끼는 중입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삶을 들여다보는 인간이라면, 아마 제가 고전에 대해서 느끼는 것들을 비슷하게나마 느끼지 않을까 감히 추측해봅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이 세상에 있었고, 아마 내가 죽더라도 계속 고전이라고 불리울 것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뭘까요?  

고전에게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존재는 누구일까요?  

고전의 내용과 주제가 인생과 세상을 담은 본질적인 것들이라서 그럴까요? 

그런 건 꼭 고전이 아니더라도 다룰 수 있는 걸텐데요. 고전이 고전인 이유를 제 나름대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1. 린디 효과


뉴욕 브로드웨이 인근에 치즈케잌으로 유명한 '린디Lindy'라는 가게가 있는데요, 린디 효과라는 통계적 법칙때문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가게 위치 상 여기에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는 배우들이 많이 들락거리는데, 이들의 관심사는 주로 '누가 공연을 얼마나 오래 하는가' 입니다. 배우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초연 후 100일 동안 공연이 지속될 경우 뒤이어 100일 더 공연이 지속되고, 200일 동안 상영된 공연은 이후 200일 동안 더 이어진다고 했는데 이를 통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린디 효과'입니다. 




'린디 효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기술이나 아이디어와 같이 부패하지 않는 일부 사물의 미래 기대 수명이 현재 연령에 비례한다"


즉, 책이나 음악같은 무생물은 나이가 많을수록 앞으로도 더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인데, 이 단순해 보이는 현상에는 "취약성"에 대한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취약성이란 외부 충격 내지는 무질서도에 대한 민감도로 정의할 수 있는데 취약성이 클수록 약한 외부 충격에도 그 존재가 사라질 수 있는 위험이 크다는 의미입니다.


고전은 오랜 시간을 살아남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의 무질서는 심화됩니다. 경제, 사회, 국가, 정치체제, 향유하는 사람들과 생활양식은 늘 시간에 따라 변화해 왔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붕괴에 저항해서, 즉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생존했다'고 표현합니다. 무질서에 저항하는 능력이 높을수록 생존 가능성은 커집니다. 고전은 '생존한' 것들입니다. 고전에게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건 다름 아닌 '시간'이구요. 


인간은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가장 깊고 넓게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수백 수천년을 생존해왔고 (린디 효과에 따라) 앞으로 그 시간만큼 더 생존해 갈 고전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지혜로운 자가 수백년 전 시대로 돌아갔을 때에도 역시 그 시대의 가장 지혜로운 자일 수 있을까요? 사람은 그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전은 그럴 수 있습니다. 

오래된 선문답이 있지요. '전문가인지 아닌지 누가 판단하는가?', '감시자를 감시하는 자는 누구인가?', '심판관을 판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린디 효과는 이런 질문에 답을 제시합니다. 바로 '살아남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판단이 옳았는지 여부는 시간이 말해줍니다. 위험과 무질서에 노출됐는데도 살아남는 것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트렌드는 일시적이지만, 클래식은 영원합니다. 

 





2.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기 (낯설게 하기)


 이처럼 고전은 인간의 보편적인 '무언가'를 다룸으로써 오랜 시간 생존합니다. 그럼 대체 그 '무언가'는 뭘까요?  인간의 감정들, 희로애락, 세상사의 질곡들, 흥망성쇠,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주인과 노예, 힘, 욕망, 삶과 죽음.... 아마도 이런 것들 중에 하나겠지요.  


그러나 이런 테마는 늘 있고 당장 서점에 달려가면 맨 앞에 놓인 베스트셀러들도 다루는 것들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고전이 우리들에게 주는 힘 중의 하나는, 이 세상에 당연해보이는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데 필요한 도구(관점)를 제공해주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유적인 상황으로 말씀을 드려볼까요? (저는 이런 식으로 유추하며 이해하는 게 좋을 때가 있거든요.)

태어나고 자라면서 세상을 이해하게 될 때는 아무 것도 없던 백지 상태에서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채워집니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생각해볼게요. 그렇게 밑그림이 채워진 채로 그냥 계속 "별 생각없이" 살다보면...네, 그냥 그렇게 계속 살겠죠. 연필로 그은 선 위를 볼펜으로, 네임펜으로 다시금 꾹꾹 눌러 그립니다. 왜 그러는 건지는 자기도 모릅니다. 그냥...이미 그려져 있는 희미한 연필 밑그림이 그렇게 생겨먹었으니 그렇게 할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굳어져 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어찌된 게 현명해지는 게 아니라 뻔뻔해지고 고집이 생기고 아집으로 똘똘 뭉쳐져 갑니다. 문제는 처음에 백지에서 이 밑그림을 그리는 것은 대개 내 의지가 아닌 남의 의지인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자크 라캉


이 연필 밑그림들은 주로 부모님, 선생님, 기타 주변의 어른들, 기성 세대가 살아가는 모습을 모방하거나, 그들의 욕망을 반영하거나, 또는 '사회적인 상식'이라는 이름의 틀 안에서 대개 의심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입니다. 세상에 나와서 우리는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부딪힌 이후에야 '세상에 참 별 꼴이 다 있군.'하며 지평을 넓혀가지만... 어쩌면 이 과정 또한 볼펜으로 선 위를 확정짓고 있거나 또는 다른 여백에 연필 밑그림을 그리는 형국일 수도 있습니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부모님/선생님/그리고 이 현 시대의 기준대로 그려놓은 연필 밑그림을 보여주는 '거울'이자, 이를 다시 그려볼 수 있게 하는 '지우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을 잘 감상하는 법은 말그대로 느끼는 겁니다. 느끼는 행위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게 합니다. 

살면서 제대로 봐 본 적 없는 연필 밑그림을요. 잘 보다 보니 정말 뒤죽박죽이고 제멋대로인 게 많습니다.

남길 것은 남기고 새로 그려야 할 것은 그려야겠네요. 그러려면 꼭 필요한 것, 바로 지우개입니다. 


고전을 읽는 이유야 사람마다 다양하겠지만...고전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우리에게 줌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합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전의 배경이 되는 곳은 시대도, 공간도, 인종도, 사회 체제도 지금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르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와 여기를 낯설게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지금은 옳고 그때는 틀리다?'  과연 그럴까요. 

고전은 꼰대일까요? 아니요. 고전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거울은 자신을 봐주지 않았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않고,

지우개는 지우지 않았다고 해서 자신을 의미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필요한 사람들은 결국 거울과 지우개를 찾겠지요. 

오래 됐다고 다 꼰대가 아닙니다. 

고전은 우리에게 묻지도 않은 것을 쏟아부으려 하진 않습니다. 고전을 찾는 것은 우리입니다.

우리 안에 무의식적으로 있는 '오래된 것들에 대한 배격'을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내가 로마인들에게 관해 가장 감탄하는 것은 최신의 것을 숭배하는 경향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이다."
  - 톰 홀랜드, 영국 역사가

   




3. 상상력


상상력은 제가 생각하기에 책임감과 더불어 지성인으로서 갖춰야하는 덕목 중의 하나입니다. 

상상력은 결코 허무맹랑한 것을 꿈꾸고 마는 힘이 아닙니다. 

역지사지를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고, 그런 점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나아가 관용의 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기저가 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력이 지식보다 중요하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 중 하나는 새로운 환경에 스스로를 노출시켜서 그 안에서 흥미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느끼는 것에 있습니다. 호스텔에서 만난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다양한 문화적 교류를 해보는 것, 그 지역만의 특산물과 요리를 맛보는 것,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멋진 경관을 눈에 담아오는 것....


정확히 같은 맥락으로 우리는 고전을 통해서 여행할 수 있습니다. 고전 속에는 정말 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별의 별 사람도 나오고, 별의 별 특수한 상황도 나오고, 아주 각양각색입니다. 때로는 그들과 대화도 해보고,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를 상상해봅니다. 작품 안에만 있지 않고 이번에는 작품 바깥의 관찰자가 되어서, 작가는 대체 왜 이런 식으로 이런 내용을 썼을까?하고 상상해봅니다. 작가의 살아온 생애가 궁금해서 또 따로 찾아보게 됩니다. 위에서 제기한 이 물음들에 정답은 없습니다. 여행에 정답이 있나요? 다 자기 스타일이 다른 건데요. 이쯤되면 고전을 감상하는 것은 출입국 수속도 복잡하지 않고 리클라이너에 기대어 커피 한 잔과 함께 떠나는 가성비 최고 여행인 셈입니다.



상상력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또 새로운 곳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듯이, 고전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좋은 재료이기 때문에 오래 살아남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고전이 아닐까요. 형태는 다양합니다. 에세이나 소설이 될 수도 있고, 오케스트라 연주가 될 수도 있고, 영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저 느껴봅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눈을 감고 들으면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나우 강이 어떻게 생겼을지를 상상할 수도 있고, <악령>의 키릴로프가 되어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강한 의지에 대해서도 상상해봅니다.


근데 상상력을 훈련하고 상상해보는 게 왜 중요할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갖춰야 하는 스탠스, 태도, 행동의 근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 두 가지 입장에서밖에 놓이지 못합니다. 가게에 가면 '손님'으로, 학교에선 '학생'으로, 회사에선 '직원'으로... 등등 말이죠.  하지만 다양한 상황 속에서 놓여보는 연습을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남을 이해하는 데 한 발 다가갈 수 있습니다. 가게의 손님이 아니라 알바생 또는사장님의 입장에 대해서, 학교에선 학생이 아니라 선생님이나 경비 아저씨의 입장에 대해서, 회사에선 직원이 아니라 사장의 입장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런 상상력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선 정말 아무 것도 모르니까요.



오래 살아남은 고전들은, 그만큼 우리네 삶에서 마주칠 수 있는 많은 입장들을 우리에게 제시해줍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마음껏 상상력을 펼치며, 갑도 되어보고 을도 되어보고  마법사도 되어봤다가 거지도 되어봅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직접 다양하게 그 입장을 실제로 겪어보는 것이겠지만, 인생은 짧잖아요. 

고전은 여러 입장들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인가 봅니다. 






4. 마치며..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휙휙 변해가고, 그 속에서 우리들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하는 데에만 시간을 써도 24시간이 모자랍니다. 퇴근하고 돌아온 저녁에 이렇게 브런치에 글 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소중합니다. 온전한 나 자신, 개성을 가진 인간 그 자체로서 존재할 시간은 쉽게 뺏겨버리고, '역할인' 또는 '기능인'으로서의 나에게 그 자리를 내어줍니다. 내가 수행하고 있는 그 '역할'이 온전히 내 스스로 욕망하고 원했던 역할인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대부분은 타인의 요구와 욕망에서 비롯된 역할들을 수행하느라 온전한 나 자신을 돌보기는 요원한 듯합니다. 





현대인은 어쩌면 '자랑스러운 독립'보다는 '측은한 고립'으로 가고 있는 것 같네요. 마음맞는 친구와 실컷 수다를 떨어도 그때뿐, 이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선 혼자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스멀스멀 다시 냄새를 풍깁니다. 


"인간은 결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는 존재다."
  - 프랑수아즈 사강


'고독'이란 테마를 평생 간직했던 프랑스의 작가 사강의 말입니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고독에 대해서 어떻게 저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죠.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인간은 고독합니다. 그러기에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사랑을 하죠. 

그러나 나 홀로 왔다가 나 혼자 돌아가는 삶이란 점에서, 고독이야 말로 인생의 본질일 수도 있겠네요.

각자 자기만의 동굴,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성이 있습니다. 

고독은 우리를 가만히 냅두지 않고 계속 흔들어댈테지만,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성이 있다면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마음속의 성을 만들되 이왕 만드는 거 널따랗게 만들어서, 

가끔은 아이처럼 뛰어다니기도 해보고 욕 보따리를 구석 한 켠에 던져두기도 하고

그렇게 켜켜이 쌓여가는 삶의 편린들과 자질구레한 것들을

천천히 천천히 지켜보며 흐뭇해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고전이라는 벽돌로 그 성을 쌓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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