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ve Slow Nov 21. 2023

[서평]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인생의 무게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한 인간의 삶은 실존하지만 정량화할 수 없는 무형의 개념이고, 흘러가는 시간 위에 존재하므로 그 가치는 과거에 대한 평가와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현재의 삶이 중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런 점 때문이겠죠. 흘러가버려야 그 가치가 증명된다는 과정을 이해하고 나면, 비단 그것이 나 자신이나 또 다른 누군가의 평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가 되어야만 가치가 발생되는, 그럼에도 지금 허투루 보내는 그 일 분 일 초가 잠시 뒤 등가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만족하거나 또는 후회하거나 또는 허무해지고 마는 인간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업무 문제로 인해 한국에서 아랍으로, 아랍에서 한국으로 또다시 유럽으로 메일이 오가며 울리는 알람을 듣는 동안에도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야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무게는 별거 없는 가벼움인 것이죠. (과부하 상태의 뇌를 쉬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프라하의 봄을 직접 겪은 작가가 겪은 조국의 현실은 작품 전체를 통해 전달됩니다. 조국을 위한 행위가 적을 위한 결과를 가져오고, 믿었던 정치인에 대한 배신감을 통해 그가 느낀 감정은 분노와 좌절을 넘어 허무함에 이르렀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조국을 포기하고 등지고 말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괴로움의 감정은 유려한 문장과 표현 속에서 노골적이지만 천박하지 않고 직접적이지만 불편하지 않기에 읽는 이에게 뚜렷한 공감대를 만들어줍니다. 가벼운 사랑에 중독된 사람과 본인과 상대 모두를 짓누르는 무거운 사랑을 가진 사람, 가진 것을 포기하고 용기를 낸 사람과 도피를 통해 정체성을 찾으려는 사람, 도덕적이지 않지만 굽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과 도덕과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 아버지를 그리워 한 사람과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 인생이 되어 버린 사람 등으로 가득 찬 비유와 은유는 사실 한 사람이자 우리 모두이고, 작가이자 독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철없던 20대의 보잘것없는 연애사 속에서도 고난은 있었습니다. 나는 테레자였으며, 내 틀 안에 사랑하는 이를 가두려는 불안함의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별을 하고 또 다른 이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확신과 믿음이 필요했던 애정결핍환자였으며, 연인의 인정이 필요한 소심하고 나약한 인간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테레자에게 더 많은 공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약하고 불안한 사람은 눈앞의 것을 붙들고 매달리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주인공들의 목가적 도피 역시 결국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되려 자기 연민에 매몰된 과거의 강압적 애정이 어떤 결말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더 뼈저리게 느끼고 마는, 자기 자신과 상대를 파괴하고 마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지점에서 이미 인생은 지나가 버리고 노쇠해 버린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이미 너무 늦은 때임을 알게 되는 처참함일 뿐입니다. 사랑의 형태가 반드시 믿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진중하고 무거워야 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어떤 이의 사랑은 멀어지는 것일 수 있고, 또 어떤 이의 사랑은 놓아주는 것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다만 내 인생을 구원해 줄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은 확률이 0에 수렴하는 도박에 가깝습니다. 그 결말은 심연의 허무함일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이든 테레자가 되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구해내야 하는 것은 일종의 숙명과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작가의 패배주의와 깊은 허무주의를 통과하는 동안 드러나는 그의 통찰력은 역설적이게도 인생의 필연성에 대한 화두를 던집니다.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 존재의 가벼움을 견딜 수 없어서 인생이 무거워진 또는 인생이 너무 무거워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로 살아가려 하는 여러 인생들이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되는 것이죠. 결국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너무도 쉽게 죽음에 내던져지고 죽음과 대면하고 마는 인간의 하찮은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마치 이란성쌍둥이와 같고, 한 아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면 다른 한 아이는 '자기 앞의 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생에 있어 사랑이 필수 불가결한 가치이자 조건이라고 믿는 부모에게서 나온 쌍둥이를 보며 예전에 적어 놓은 '자기 앞의 생'에 대한 메모를 다시 꺼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그럼에도 사랑하라."

매거진의 이전글 [서평] 멋진 신세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