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AI가 잘하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by 카이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마이클 폴라니의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지난주 한 대기업 임원이 던진 질문 앞에서 그 의미가 선명해졌다. "AI로 다 바꿔야 하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회의실에 앉아 있던 다섯 명의 고객사 담당자들 모두 비슷한 표정이었다. AI라는 마법 상자에 모든 업무를 집어넣으면 완벽한 결과물이 나올 거라는 기대감.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바로 폴라니가 말한 '암묵지'였다. 문서로 정리할 수 있고, 데이터로 학습시킬 수 있는 '명시지'는 AI가 순식간에 흡수한다. 하지만 왜 이 고객은 저 문구에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왜 이 시점에 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같은 암묵지는 여전히 인간의 영역이다.


"드래프트는 정말 잘 써내려가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실무에 적용하려니..."

최근 만난 한 변리사의 하소연이 생각난다. 특허 문서 초안을 AI가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걸 보고 감탄했지만, 막상 클라이언트에게 제출하려니 불안해서 결국 처음부터 다시 검토했다고 한다. 수백 건의 선행특허를 검색하고 유사도를 분석하는 건 AI가 압도적으로 빨랐다. 하지만 "이 특허가 정말 우리 기술의 핵심을 보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AI는 침묵했다.

이것이 바로 LLM의 본질적 한계다. Large Language Model, 거대 언어 모델. 이름 그대로 언어의 패턴을 학습한 존재다. 수많은 텍스트 데이터에서 가장 그럴듯한 다음 단어를, 다음 문장을 찾아내는 일에는 천재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옳은' 답인지, '필요한' 답인지를 판단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우리 팀은 이제 AI 덕분에 10배는 빨라졌어요"

얼마 전 만난 스타트업 대표의 말이다. 그의 팀은 변리사 한 명과 개발자 두 명으로 특허 관련 서비스를 운영한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규모다. 비결을 물었더니 답은 간단했다. AI에게 생산을 맡기고, 사람은 검증과 의사결정에 집중한다는 것. 선행특허 검색, 초안 작성, 유사도 분석 같은 '생산' 영역은 AI가 담당한다. 하지만 "이 특허 전략이 클라이언트의 비즈니스를 진짜 보호할 수 있는가?"라는 판단은 오롯이 사람의 몫이다.

실제로 일하면서 가장 자주 목격하는 현상이 있다. AI를 도입한 팀과 그렇지 않은 팀의 격차가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단순히 AI를 '사용'하는 팀이 아니라 AI를 '제대로' 사용하는 팀이 승자가 된다는 것이다. 20년 경력의 변리사가 AI를 만나면 혼자서 로펌 하나와 맞먹는 생산성을 낼 수 있다. 하지만 AI만 잘 다루는 개발자가 특허 업무를 한다면? 겉보기엔 그럴듯해도 핵심을 놓친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승자독식. 최근 AI 시장을 보며 가장 많이 떠오르는 단어다. 하지만 이 승자는 단순히 AI를 잘 다루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도메인 지식과 AI를 결합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빠는 AI랑 어떻게 일해?"

아들의 질문에 나는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새로운 제품 기획서를 작성하는데, 먼저 Claude에게 시장 분석과 경쟁사 벤치마킹 자료를 정리해달라고 했다. 30분 만에 5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가 나왔다. 예전 같으면 일주일은 걸렸을 일이다. 하지만 그다음이 중요했다. "우리 고객이 정말 이것을 원할까?" "우리가 이것을 왜 만들어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내가 직접 써내려갔다. 고객과의 미팅에서 들었던 작은 불편함, 시장에서 놓치고 있는 빈틈,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차별화 포인트. 이런 것들은 AI가 아닌 내 경험과 직관에서 나왔다.

저녁을 먹으며 아내가 물었다. "요즘 회사들이 다 AI, AI 하던데, 정말 다 바뀌는 거야?" 나는 오늘 고객사 미팅을 떠올리며 답했다. "바뀌긴 할 거야. 하지만 모든 걸 AI가 하는 게 아니라, AI와 함께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세상이 될 것 같아."

폴라니의 말처럼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AI는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학습하고 재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고객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어내는 것, 팀원의 사기를 북돋는 타이밍을 아는 것, 아이의 글에서 진심을 느끼는 것. 이런 암묵지는 여전히 우리의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정말로 모든 암묵지가 명시지로 변환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20년간 수천 번의 미팅에서 느꼈던 그 미묘한 공기의 변화들, 고객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채는 순간의 직관, 첫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 느꼈던 그 쓰라린 맛까지. 혹시 이 모든 것이 데이터가 된다면? 내 망막에 맺혔던 수십만 개의 표정들, 고막을 울렸던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들, 손끝으로 느꼈던 키보드의 감촉과 그때마다 떠올랐던 아이디어들까지. 그야말로 한 인간이 살면서 경험한 모든 것이 0과 1로 기록되고 학습된다면, 그때의 AI는 과연 나와 무엇이 다를까?


아들이 완성한 글짓기를 다시 본다. "그날 정말 무서웠어요"라는 문장 속에는 아이가 어둠 속에서 느꼈던 심장 박동과, 엄마 손을 꼭 잡았던 손바닥의 온기가 담겨 있다. 언젠가 AI가 이런 감각까지 모두 학습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이 암묵지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마지막 보루다.

AI는 만능이 아니다. 적어도 아직은. 하지만 우리가 가진 암묵지와 AI의 명시지 처리 능력이 만날 때, 비로소 진짜 혁신이 일어난다. 그리고 언젠가 그 경계마저 사라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 우리는 무엇으로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내가 오늘도 AI와 함께, 그러나 여전히 나만의 방식으로 일하는 이유다. 암묵지가 남아있는 동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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