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벨롭퍼의 등장, 그리고 진짜 개발자에게 남은 것
프로슈머라는 말을 기억하는가.
유튜브와 1인 창업 시대가 열리면서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하는 사람들을 부르던 말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허물어지던 시절, 우리는 그 현상에 이름을 붙였고, 이름이 붙자 현상은 더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제 비슷한 이름이 필요한 시점이 왔다. 이번에는 사용자와 개발자 사이에서. 나는 이들을 유벨롭퍼 (Uveloper)라고 부르려 한다.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직접 만들어 쓰는 사람들. 코딩을 모르지만 개발을 하는 사람들.
얼마 전 한 기사를 보았다. 공장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공정 검사를 위한 앱을 직접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결과는 생산성 6배 증가. 그들은 개발자가 아니었다. 코딩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해당 업무에 대한 깊은 이해. 매일 그 라인에서 일하며 어디서 병목이 생기는지, 무엇이 불편한지,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그 업무를 구조화해내는 능력이다. 막연한 불편함을 "이런 입력이 들어오면 이런 출력이 나와야 한다"는 형태로 정리해낼 줄 알았다.
코딩 지식은 더 이상 장벽이 아니다. AI가 대신해준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이제 누구나 자신만의 도구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개발자는, 개발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개발에는 크게 두 가지 영역이 있다. 고객의 요구사항을 받아서 구현해주거나, 스스로 플랫폼을 만들어 생태계를 창조하거나. 어느 쪽이든 기획이라는 것이 있고, 그 기획에 맞춰 개발이 진행된다. 여기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기획자, 즉 사용자가 개발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면, 개발자는 기획의 영역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사용자보다 더 촘촘하고, 더 사용성이 좋은 기획을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 회사에서도 많은 요구사항을 듣고 개발을 한다. 하지만 고객의 표면적인 요구사항만 듣고 일하지는 않는다. 고객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업무, 암묵지에 가려진 정보, 구전되어 오는 불문율. 이런 것들은 요구사항 문서에 절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업무를 제대로 자동화하고, AI가 사람처럼 추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들이다.
우리는 이를 실무자 심화 인터뷰로 얻어낸다. 실제 일하는 모습을 바로 옆자리에서 들여다본다. 녹음기를 켜놓고 하루 종일, 필요하면 일주일 내내 같이 업무를 한다. 동일한 업무를 하는 사람 두세 명을 인터뷰하면 상호 간 차이점이 드러난다. 이 차이를 대표나 실무 리더와 함께 표준 기준으로 합의한다. 그렇게 그 회사의 업무 노하우가 반영된 표준 프로세스가 만들어진다.
개발자와 개발사는 이런 방식으로 기획에 더 깊이 관여해야 한다. 사용자의 업무를 직접 해본 적 없어도, 그들보다 업무의 구조화를 더 잘해낼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소통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유벨롭퍼 시대는 개발자의 종말이 아니다. 오히려 개발자에게 더 높은 수준의 역량을 요구한다. 코드를 짜는 능력이 아니라, 사용자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 표면 아래의 구조를 읽어내는 능력. 그것이 앞으로 개발자를 개발자이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 코딩 교육을 받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본다. 물론 개발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그 끝을 찍을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길이다. 하지만 대부분에게 그 길은 쉽지 않고, 무엇보다 승자독식 구조가 심하다.
차라리 기획과 협업에 더 초점을 두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 복잡한 것을 구조화하는 능력. 다른 사람의 말에서 진짜 필요를 읽어내는 능력. 이것들이야말로 유벨롭퍼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먼저 가르쳐야 할 것들이 아닐까.
프로슈머라는 말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저 유행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단어는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짚어냈고, 결국 우리 모두의 삶을 바꿨다. 유벨롭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은 낯선 조어에 불과하지만, 몇 년 후에는 누구나 당연하게 쓰는 말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때 우리는 어느 쪽에 서 있을까. 여전히 개발을 의뢰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직접 만들어 쓰는 사람일까. 혹은 그 둘 사이에서 더 깊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