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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더스 FINDERS Feb 03. 2022

편지로 연대하기

편지에 관한 에세이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밤마다 야금야금 읽으며 마음이 부풀었던 때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된 영국의 영토 건지섬에 살았던 사람들과 런던에 살고 있는 작가 줄리엣은 우연한 기회로 편지를 주고받는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들은 좋았던 책에 관해,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점차 친밀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로 구성된 이 소설을 읽으며 나 역시 이들이 보낸 편지의 수신자–정확히는 숨은 참조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 FINDERS


“우리는 각자 읽은 책을 서로에게 권하길 좋아하니까, 편지 형식으로 책을 한번 만들어보면 어때요?” 함께 팟캐스트 ‘시스터후드’를 만들고 있는 윤이나 작가에게 이런 제안을 건넨 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책을 좋아하고, 그에 대해 말하는 걸 좋아하는 친구 두 사람이 같이 만들 수 있는 멋진 무언가가 있다면 그게 편지로 구성된 책일 것 같아서. 


그 후 2020년, 우리는 ‘수요일에 만나요’라는 유료 뉴스레터 서비스를 시작했다. 코로나19의 시대와 함께였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친구와 나는 예전만큼 자주 만나지 못했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야말로 편지를 써야 할 때가 아닐까? 일주일에 한 통씩, 친구와 내가 격주로 각자의 이야기면서 책이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 편지를 써보기로 했다. 물론 우리는 직접 만나지 않아도 메신저로 수많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다행히도 언제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아 있었다. 


그런데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하는 사람인 나에게 편지 쓰기는 생각보다 아주 까다로운 동시에 무척 안전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편지를 쓸 때는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숨길 수 없다. 내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으면 상대방도 제대로 된 답장을 할 수 없어 편지는 꼭 종잇장의 얕기로만 오간다. 나는 그 어디서도 하지 않았던 말을 편지로 옮기기로 했다. 내 이야기를 하기 어려워서 자꾸만 영화나 드라마 뒤에 숨는 소심함을, 돈이 없을 때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고 싶지 않고 돈으로 타인의 존엄성을 평가하고 싶지 않은 바람을 고백했다. 내가 꺼낸 말이 허공을 떠돌지 않고 누군가에게 가닿는다는 감각은 편지 쓰는 일을, 글 쓰는 일을 점점 덜 두렵게 만들었다. 


얼마 전 ‘수요일에 만나요’로 썼던 편지들을 묶어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라는 책을 냈다. 편지를 주고받는 마음이 결국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아서 붙인 제목이다. 이 책을 읽고 독자들이 남긴 소감 중 편지 형식으로 쓰인 글이 많다는 게 좋다. 우리의 편지를 읽으며 어떤 친구가 떠올랐는지, 어떤 문장에서 멈추고 자신을 비춰보게 됐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답장으로 전해받는 것 같아 기쁘다. 내가 친구의 편지로, 누군가의 답장으로 인해 계속해서 편지를 써볼 용기를 낼 수 있었듯, 또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편지로 인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편지를 쓰기 시작할 거라는 사실에 가끔 뭉클해진다. 이렇게 우리는 편지로 느슨하게 연결된다.


황효진은 작가이자 기획자다. 여성이 보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팟캐스트 ‘시스터후드’를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의 공동 저자 윤이나 작가와 함께 만든다. 일하는 밀레니얼 여성을 위한 커리어 상호 성장 커뮤니티 ‘뉴그라운드’도 운영하는 그는 우정을 넘어 연대하는 법을 고민한다. 다양한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고 때때로 실패하며 오늘도 성장한다. Instagram @hwanghyo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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