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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익 Oct 16. 2024

위계 속에 존재하고 있었구나

하긴 가족도 위계가 있지.

위계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본 적 없다. 나는 오랜 시간 조직에 몸담아 일하고 있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사이코진을 읽다가 2호의 주제는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이다. 매거진의 앞부분에는 한국 직장문화에 대한 글이 실려있고, 이어서 덴마크의 직장, 조직 일터 문화에 대해서 인터뷰한 글이 실려있다. 두 나라를 나란히 배치하면서, 한국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 체감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의식하지 못했던 일, 휴식과 여가에 대한 태도, 조직과 개인, 소통의 방식에서도 나는 영락없이 한국인이구나를 실감했다. 조직에 몸담고 있지 않는 프리랜서임에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한 기업상담사는 한국 직장 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을 ‘위계’라고 짚었다.


위계

위계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에피소드는 교회에서 목사님과의 관계였다. 잠깐의 교사모임을 떠올려보면 목사님이 추구하시는 방향을 듣고, 어떠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가 뒤늦게 생각해 보니 내가 했어야 하는 말들을 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왜 그랬을까? 목사님의 의도를 듣고, 거기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맞춰드리고 싶었나? 비위를 거스르기 싫었나? 목사님과 나는 수평적인 관계라고 생각했지만(딱히 뭐 그런 고민을 많이 하지도 않았는데) 알게 모르게 위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억울하거나, 불리한 입장이라고 토로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나이, 경륜, 교회에서의 리더십이라는 이유로 목사님이 갖게 되는 위계가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그것을 노골적으로 꺼내놓고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아니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동의된 바가 있는가 보다. 아마 목사님께서 아시면, 의외로 놀라실지도 모른다. 나는 할 말을 다 하는 캐릭터인데 나름.


생각해 보면, 어른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고 어른들에게 지적을 당할까 봐 몸 사리는 것은 내게 본능과 같이 자연스럽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 시부모님에게 사랑받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본인이 상처받고 지쳐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원하는 만큼 오지 않으면 관계에서 떠나버리는게 수순이지 않나. 가족에서부터 위계에서 자유롭지 않구나 생각하니까, 떠오르는 일들이 몇 있긴 한데 그러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가족 내에서 이런 문제로 골치 아파하며 산다.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는 것,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겠구나 실감했다. 우리가 자기가 약해져 있을수록,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가 흐릿해져 있을수록, 의사소통하는 데 있어서 수동적이게 된다. 그러면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자기를 잘 돌보고, 자기와 가깝게 지내며,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일수록 의사소통과 대인관계와 직업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보다 만족스러운 건 당연한 것 같다. 자기 돌봄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찍 소리도 못하던 시절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한국의 시어머니 캐릭터는 불통과 무례의 캐릭터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왜 ‘어른’을 보면 긴장하고, 겁을 내는 걸까.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란, 리더십을 갖는다는 건 위계에서 우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살다가 어느 위치가 되면 좋은 어른, 리더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늘 고민하지 않나. 가족도 위계고, 그렇게치면 나도 내 자녀에게는 윗사람, 주일학교 아이들에게도 윗사람, 교사, 후배에게는 선배라는 윗사람, 나도 상대적으로 위에 있는 관계가 있다. 나는 어떤 어른인가? 소통하는데 문화와 세대의 장벽을 넘어서 눈높이를 맞추는 데까지 여러 시도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기왕이면 그 시도를 부지런히, 끊임없이, 내가 먼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위계가 질서라는 점에서 위계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도 그닥 없다. 다만 이 질서 안에서  자기 권리를 너무 많이 주장하지도, 너무 빨리 포기하지도 않으면 어떨까. 존중받아 마땅한 내 의견을 좋은 태도로 말하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이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게 내 삶에 책임과 통제권을 가지려는 시도이지 않을까. 먼저 내 삶을 돌보고 가꾸고, 사랑하고, 내 의견을 존중하는 것부터가 시작인 것 같다. 위 아래, 남녀노소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는 ‘나‘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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