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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로운 은둔자 Aug 19. 2021

미국에서 한국인이 되었다

2012 1,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아니, 사실 몸은 바빴지만 마음은 몽롱한 상태에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태평양 건너 언어와 문화가 모국과 비슷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라에서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분명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유발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감정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리 아름답지 못한 상태로 전환되고 말았다. 인생 처음으로 14시간의 비행을 거친 후에 도착한 뉴욕에서의 차가운 겨울의 기운은 미국에 대해 살가운 인상을 가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화에서   있었던 미국인들 특유의 친절함과 느긋함에 대한 동경은 JFK 공항에서 마치 죄수들을 다루듯 입국자들을 향해 거칠게 말하는 공항직원들의 불친절함에 미국 영토에 첫발을 내리자마자 와장창 깨져 버렸다. 느긋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고양이과 맹수처럼 냉정함이란 발톱을 숨기고 있는 것이 미국이란 사회란 것을 그때서야 절감한 것이다.  경계심은 이방인, 특히 비유럽계이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하는 자들에게는  가혹하게 몰아친다는 것을 누가 미리 알려 주었다면 좋았으련만. 이러한 경험은 공항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겨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미국 여행 안내책자에서 뉴욕시의 록펠러 센터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기억이 있었지만 그곳은 겨울의 낭만적 설레임을 만끽하고자 하는 연인들의 성지였지 내가 잠시 들러서 여유를 누릴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감정상태가 어찌되었든 모든 면에서 낭만이란 찾아 볼 수 없는 유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제는 혹독한 인내심을 기르는 것 외에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영어 실력의 발전이 기대한 만큼의 반도 미치지 못 했기 때문에 학교 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그에 따라 시간은 초단위로 느리게만 갔다. 호스트 가정에서 마련해 준 값싼 매트리스는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가운데가 움푹 파여가는 바람에 철제 침대틀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고 마찬가지로 나의 몸 또한 그렇게 말라가고 가고 있었다.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것도, 체육시간을 통한 운동량이 적었던 것도 아닌데 몸은 교과서적인 건강한 생활습관과는 다르게 계속 생기를 잃어갔다.

    


그렇게 중학교에서의 반 학기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참석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이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직도 부족한 영어실력과 극단적으로 내성적었던 나의 성격이 전형적인 미국 고등학교에서 그 장점을 발휘할 리가 만무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시골에서 자란 미국 학생들은 말 그대로 미국 월등의식에 쩔어 있었기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뒤흔들었다. 한 미국인 남학생이 한인마트에서 산 김을 가지고 와서 친구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먹었을 때 하나같이 나온 반응은 “Aww, what is that? (으엑, 그게 뭐야?)” 불행하게도 그 자리에 있었던 나는 그것이 해조류 식품인 김이란 것이고 한국에서는 이렇게 말리고 기름과 간을 해서 먹는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알리기는 커녕 정작 한국인들은 그것을 먹지 않는다고 부정해 버렸다. 자국에서 널리 사랑받는 식품을 한국인인 나보다 미국인이 오히려 더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모순을 초래했다는 사실에 든 자괴감과 죄책감이란.

    


어째서 나는 미국 사회의 주류에 들어가고 싶은 열망을 가져야만 하는가? 나의 조국은 부끄러운 문화를 향유하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미국에 오기 전까지 의식하지도 않았던, 내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유학 첫 4년 동안은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의 연속이었다. 한국어보다는 필사적으로 영어를 쓰려고 노력했고 행동도 미국인처럼 하려 주의를 기울이는 방향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만 말하자면 한국인들에게는 소위 너무나 미국물을 많이 먹은 예의 없는 놈이 되어 버렸고 미국인들에게는 그저 이방인에 불과했다. 색깔을 열심히 바꿈으로써 자연환경에 맞추고 동화되어야지만 살아남는 카멜레온처럼 나는 모든 면에서 공통점이란 찾아 볼 수 없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내 양 발을 하나씩 디디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로써 모국에는 반역자가 되었고 미국에는 침입자가 되어 버렸다. 그제서야 어째서 교포들이 한 세계에 동화되려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하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이질감 없이 동화되고 만족감과 소속감을 얻을 수 있는 안식처를 찾으려 고민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랑자로서의 고민은 삶에 커다란 이점 또한 안겨 주었다. 우선은 타인들에 비해 한 집단이나 사회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이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관찰력과 비판력을 가지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과 미국이라는 상반된 두 사회에서의 경험은 사회질서, 가치관, 도덕의식, 관점 등을 평가하는 기준을 확장시켜 주었다. 이것은 마치 특정한 정치적 관점에 함몰되지 않고 여러 종류의 언론을 읽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나에게 있어서 한국적이란 관념은 올바른 것도, 가치 있는 것도, 혹은 절대적인 것도 아닌 그저 한국이란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관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적 혹은 서구적 가치관은 나에게 매력 있는 환상도, 따라야 할 규범도 아닌 수정을 해서 한국 문화의 장점과 결부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그 격이 낮아졌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스스로를 한 특정 사회에 가두기를 거부하며 언제나 이 두 사회의 장점들을 떼어내고 개조해서 나만의 이상적인 가치관을 만들어 내는 것은 유학을 통해 매운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자리잡았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애국자가 되기 위해 조금 구부진 길을 돌아왔지만 그 결과는 고단한 과정을 잊게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었다. 단단한 정체성을 확립한 순간부터, 미국이 나를 짓누르게 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차린 후부터  이상 김을 부끄러워 하지도, 영어보다 한국어가  편하다는 사실을 애써 숨기지도 을 수 있었다. 한국의 문화와 음식을 아예 몰랐던 미국인 여성과 결혼해서 단골 저녁으로 육개장과 김치찌개를 끓여 먹는 가정을 이루었다. 미국인들조차 첫만남에서 자주 교포로 생각할 정도로 영어와 행동에 있어서 미국 사회에 동화되었지만 나는 비로소 성인이 되어서야 한국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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