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닿고 싶은 마음
여름은 한참 전에 시작되었는데 한창이어야 할 매미소리를 들은 것은 하늘에서 한 바탕 물난리를 내린 후 이번주가 처음이다. 종로구 북한산 기슭에 사는 매미들만 유난히 게을러 그런건지, 내가 주의깊게 듣지 않고 있다가 지금에야 매미소리를 '인지'하게 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아무튼, 염천 삼복 더위가 시작 되었지만 우리집 잠자리에는 언제나 38도짜리 털뭉치들이 옆에 와 붙는다. 이쁜 고양이가 와서 안긴다는데 어떤 상황이라도 거절할 리는 없지만 내 한 몸도 더워 돌아가실 지경인 이런 날씨에는 솔직히 '좋아 죽을'만큼 좋지는 않다.
우리 고양이-까망이와 노랑이-들은 어릴때부터 무릎에 잘 올라오는 살가운 아이들이었다. 동복으로 태어난 네마리 형제 모두가 태생적으로 앞발 기형이었던 것 같다. 한 녀석은 제일먼저 입양되어 가버리고 처음 만났을 때는 세마리 중 발 기형이 제일 심한 까망이, 상태가 크게 다를 것은 없으나 그래도 분홍젤리가 조금 더 남아있는 노랑이 모두 발톱을 감추지 못했다. 때문에 장판이나 마루를 걸어다닐 때 갈고리처럼 튀어나온 발톱에 보통 고양이라면 절대 들을 수 없을 '짜박 짜박' 소리가 난다. 처음 데려온 그 시점에는 꼭 쥐기라도 하면 부서질 것처럼 연약하고 불안한 그 작고 가냘픈 아기 고양이들이 그들 기준에서 보면 선잠에 뒤척대는 진격의 거인 사이즈 체중에 깔릴까 걱정되어 따로 떼어 놓고 자야 했다. 시간이 가면서 우리가 두 고양이들의 봄날 햇볕같은 아련함에 중독되었듯, 아기 고양이들도 자신을 보살피는 손-시간마다 먹이고, 항문을 마사지 해서 응아를 짜내고, 자기 스스로 그루밍 할 수 없는 귀과 턱아래를 쓰다듬어 주어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인간 손길에 길들어 버렸다. 언젠가 이야기 했던 것처럼, 한밤중 겅중겅중 "Winnie the pooh"의 티거처럼 뛰는 그 모습에 문을 열지 않곤 배길 재간이 없어 결국 언제부턴가 강제로 잠버릇 나쁜 남편과 따로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나도 어느 정도 뒤척거리는 잠버릇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깔고 자면 안된다는 긴장 속에 잠드는 날이 많아 그런건지 결국 누은 자세 그래로 아침까지 시체처럼 꼼짝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언젠가, 자면서 움직이지 않으려고 괴로워하는 내 모습을 남편이 찍어놓았다가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다리 사이에 한 마리, 오른쪽 팔에 한 마리를 끼고서 꼼짝하지 않으려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고양이들도 자라면서 점점 독립적인 홀로있는 시간,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가는 걸음걸음마다 아장아장 자박자박 쫓던 껌딱지 시절이 있었던가 싶게 대부분 자신의 몸단장과 잠, 창밖을 관찰하거나 나름 마음에 든 장소를 다른 형제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사수하(며 자)는데 쓴다. 고양이들이란 '만지는 마약'과 같아서 한 번 그 신묘한 촉감을 알고 나면 다시는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법. 다 자라서 늠름하게 혼자인 시간을 견딜 줄 알게 된 고양이와 달리 그들의 인간 집사는 점점 시도 때도 없이 고양이를 찾는다. (고양이를 소재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Soon 작가의 탐묘인간 한 에피소드 중에 고양이 앵두가 자기 배를 주물주물 빚어서 집사에게 찹쌀떡을 건네주는 꿈 이야기가 있는데 딱 그 느낌이다. 연하고 얇은 피부의 말랑 쫄깃한 뚱냥이 고양이 배의 느낌을 그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머리속에 고양이에 대한 자극이나 스위치가 켜지면 마치 충동조절 장애라도 있는 사람처럼 온 집을 스캔하여 급히 고양이를 찾고 허기진 촉각의 만족을 위해 게걸스레 쓰담쓰담을 퍼붓는다. 느긋한 편인 노랑이는 많이 참아주고 자기 욕구에 충실한 까망이의 경우 한 두번 참다 제법 앙칼진 소리로 싫다는 표시도 내고 고개를 획 돌려 물어서 응징하기도 한다. 자기들이 들러붙을 때는 거절 못하고, 집사가 좀 만지겠다면 이렇게 비싸게 굴다니...치사하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더 사랑하는 쪽이 덜 사랑하는 쪽보다 파워게임에선 밀리게 되어 있다.
성체가 된 개체 간에는 아무리 친한 관계여도 살과 살, 온기가 닿는 경험은 너무나 사적이어서 긴밀하고 특별한, 허락된 관계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예전에는 비교적 신체적 접촉에 관대했던 우리나라지만 지금은 비록 할아버지 할머니라도 자녀들의 아이들을 안거나 만지려면 허락을 구하는 것이 맞다. 심지어 부부라도 극도로 짜증 치미는 끈끈하고 더운 날, 서로의 허락 없이 옆에 붙으면 등짝 스매시를 면치는 못할 터. 하물며 그 외의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시도할 수도, 시도해서도 안되는 금기와 의례의 영역이 되었다. 의례화 한 접촉의 대표 케이스인 악수는 서로 두 팔이 1/3정도 교차될 수 있는 거리에 서서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가벼운 목례나 미소를 곁들여 오른손을 맞잡고 흔들되 다른 손은 반드시 상대가 보이는 위치에 두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렇게 상세한 전례가 답습되고 복제되어 매너로서 존재하게 된 이유야 일상적 전쟁과 테러, 살육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 대표적이기는 하나 태국이나 캄보디아에서 머리를 만지지 못하게 하는 것, 신체노출에 상당히 너그러우면서 목덜미는 눈접촉도 꺼려 여자 중고교생 '포니테일' 금지학교가 많은 일본, 머리카락을 생식기에 준하는 것으로 보는 이슬람권까지 종교나 문화적 영향으로 신기한 금기에서 형성된 다양한 매너들도 존재하고 있다.
이야기의 경계를 바꿔서, 아기나 어린이들의 경우 부모로부터 충분한 신체접촉과 애정표현을 받지 못할 경우 인지정서발달에 심각한 손상과 장애가 생긴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역사적 비극, 차우세스쿠 시절 루마니아의 고아원에서 보육인원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고아들의 수로 열악해진 환경 하에서 하루 종일 한 번의 손길, 안아주는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난 아이들이 극심한 정서 장애로 인해 몸도 마음도 병들었던 것은 유명한 증거사례다. 애정어린 충분한 접촉, 보살핌이 결여된 경우 관계형성이나 공감, 사회적 지능 발달도 안되었고 심지어 면역체계조차 위협 받았다.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먹고 자는것만이 아니라 충분한 접촉과 애정표현, 눈맞춤과 같은 풍부한 자극이 모두 필요한 법이다.
이런 저런 사회적 생리적 이론을 알아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게 되는 것이 아닌 줄 안다. 진화적으로 인간은 자기 새끼, 핏줄이 아닌 동종 영유아에게조차 보호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끔 프로그래밍 된 존재라니까 어쩌면 머리와 눈이 크고 하관이 좁은 아기처럼 생긴 모든 생명에게 보호의 감정을 저절로 갖게되는지 모르겠다. 고양이들의 경우 머리에서 김 나는 열정적 놀이를 요구하는 시기가 놀랍게 짧아서 대여섯살만 되어도 일반적인 쥐돌이나 오도리 따위엔 반응조차 없게 된다. 더 이상 엄마아빠에게 놀아달라 조르지 않는 십대 자녀들에 대하여 다행스럽다는 감정과 섭섭함이 양가적으로 드는 것처럼, 다 큰 성묘들의 집사도 그 시기를 맞으면 비슷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다른 점이라면, 인간 아이들은 한 번 멀어지고 독립할 마음을 먹으면 어지간 해선 다시는 회귀하는 법이 없는데 비해 고양이들은 그래도 잠자기 전이나 제 스스로 그루밍할 수 없는 곳들을 만져달라며 주기적으로 집사를 찾게 되어 있다는 점 정도랄까. 한 편 강아지보다 고양이는 교감하는 횟수나 강도가 적다는 점-한 마디로 독립적이라서-을 들어 기르기 쉽다는 식으로 단정지어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개인차만큼 개묘차도 매우 크다. 이런 부주의하고 영혼 없는 충고를 듣고 고양이를 인테리어 소품처럼 들였다간 한 생명에게 큰 고통을 주게 될 수도 있으니 신중하기를 바란다.
어린 날의 보살핌만큼 노년의 인간에게도 신체적 접촉은 중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적으로 용인된 신체접촉 자유로운 배우자 있는 노인과 없는 노인 간의 삶의 질에 관한 연구에서도 알려져 있듯, 가벼운 피부접촉이 많은 노인은 그렇지 못한 노인에 비해 훨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함을 유지하기 쉽다. 흉한 비유가 될 수도 있겠으나 전근대의 돈과 권력있는 노인들이 어린 아이들을 성교 목적 없이 단순히 품고 자는 목적으로 데리고 있었 풍습도 접촉의 욕구, 애정의 욕구를 푸는 -비록 그로테스크하고 뒤틀린 착취관계였지만- 그 옛날의 오래된 방법 중 하나였다. 내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데 무슨 반려동물이냐 할게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돌봄을 필요로 하는 인간 손자나 손녀도 마침 없다면 동물보호소에서 작은 생명 하나라도 구해 돌보는 편이 자신을 위해서도 건강한 노후를 보내는 삶의 방편이 될 수 있다.
낮 기온 32도를 오르 내리는 더위에도 젤리나 꼬리 끝이나마 내 살 어느 한쪽에 닿고싶은 마음, 그 마음이 고마워서 나는 염천 삼복 더위에도 털뭉치를 거절하지 못하고 있다.
습하고 더운 와중에도 봄날 햇볕 냄새가 나는 너희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The End of the epis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