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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 저 Mar 06. 2022

호감과 비호감, 악함과 선함 간의 관계

넷플릭스 드라마 <애나 만들기( Inventing Anna )> 리뷰

***스포일러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음.***


 가끔 특별한 계기나 이유 없이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을 끝까지 보는 것이 힘에 부칠 때가 있다. 이 시기에는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따라가는 게 부담스럽고 분명히 각기 다른 매체의, 각양의 이야기들이 어째서인지 일률적으로만 느껴져 집중하기 힘들고 지루하게만 느껴진다. 그럴 때면 자체적으로 콘텐츠들을 멀리 하는 디톡스 기간을 가지곤 한다. 최근에 공개된 넷플리스의 <애나 만들기>는 이런 미디어 권태기를 겪고 있던 내가 간만에 짧은 기간 내 끝까지 완주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가 전에 없던 독창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매우 독특한 전개 방식을 가지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라 배우들의 뛰어난 열연이 눈에 띄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이 가볍게 볼 수 있으면서 소소한 흥미 요소를 가진 넷플릭스 시리즈들의 평균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한 점이 오히려 끝까지 볼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니면 단지 그즈음 유달리 시간이 남아 돌아서였거나. 나만의 권태기가 이유 없이 시작했듯이 또 이유 없이 갑자기 끝났나 보다.


 이 드라마는 몇 년 전 화제가 되었던 범죄 이야기를 재현한 시리즈로, 본인을 유럽 재벌의 상속녀로 위장해 뉴욕 사교계를 대상으로 사기 행각을 벌였던 한 범죄자, ‘애나 델비’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도 그때 관련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당시 해외의 가벼운 토픽으로 가볍게 보고 넘겼고 과연 21세기에 일어날 만한 이야기인지 의아해했던 것만 기억한다. 이 드라마는 제목에서부터 애나에 대한 이야기지만 애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드라마의 시작 시점부터 이미 그녀의 범죄는 벌어진 상태이고 심지어 이미 그녀는 수감된 상태이다. 사건에 관심을 가진 (특종이 간절한) 저널리스트 '제시카 프레슬러'에 의해 밝혀지는 범죄의 전말에 대한 플래시백이 과거 시점에서 극 진행의 한 축을 이루고, 또 제시카가 애나의 행적을 쫓아가고 그녀를 인터뷰하며 발생하는 저널리스트와 애나 간 의 관계가 현재 시점에서의 또 다른 한 축으로 담당한다.


 방구석 시청자일 뿐인 내가 우리나라의 콘텐츠들을 보면서 아쉬웠던 점 중 하나는 호감가지 않는 캐릭터들로만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치 암묵적인 룰로 시청자들이 편히  마음을 내어주고 기댈 수 있는 호감 가는 캐릭터를 의무적으로 심어둬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 것 같다. 아마 한국에서 같은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었다면, 애나는 알고 보면 굉장히 억울한 사연을 지닌 범죄자임이 밝혀지거나, 그것을 밝혀내가는 저널리스트가 정의롭고 바르기만 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 <애나 만들기>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지 본인을 유럽의 상속자로 꾸며낸 사기 범죄자일 뿐이고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는 과정에서도 그녀가 실은 숨겨진 선의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대단한 명분이 있어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또한 그녀의 범죄 행각이 주도면밀하고 전문적이라 범죄 과정 자체가 매우 긴장감을 준다거나 감탄하게 될만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애나의 피해자들조차 억울하기만 해 연민 가는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보통의 우리와는 너무 다른 세상의 인물들처럼 과하게 부유하고 이질적이다. 애초에 그녀의 범죄가 성립 가능했던 이유는 그녀를 유럽의 부유한 상속자인 줄만 알았던 피해자들이 그녀를 통해 본인들만의 이익을 얻기 위해 속음으로 인한다. 그 욕구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드라마 속 표현된 그녀의 (마치 의도한 듯한) 매력 없음과 엉성한 범죄 수법에도 그녀에게 매혹되고 속는 사람들을 보면서 범죄의 가해자인 그녀와 피해자 모두를 조소하게 한다. 심지어 어떤 인물은 그녀가 수감된 상태에서도 그녀가 단지 억울한 상속녀일 뿐이라 믿고 있다.

 그렇다면 사건의 전말을 조사해가는 저널리스트 '제시카'는 어떠한가. 그녀는 우리에게  흔히들 생각되는 '프로페셔널한 저널리즘'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녀 또한 과거의 기자로서의 과오가 있었고, 그 과거의 사건에 대해 그녀가 억울함이 있건 없건 간에 그녀가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던 중요한 동기 중의 하나는 과거의 그 일 인해 추락한 본인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또한 후반부에 그녀가 범죄자인 애나에 연민을 느끼고 객관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보면 오히려 그녀에게 극이 끝날 때까지 거리감을 두게 한다.


 이 지점이 내가 생각하는 이 드라마의 진정한 매력이 있다. 드라마 속 거의 모든 인물들에게 완벽히 빠져들기 어렵게 하고, 그들이 가진 비호감인 면들을 의도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을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드라마 속 그 인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그들에게 공감을 할만한 지점들이 있고 또한 어떠한 종류의 매력을 느낄만한 포인트들이 있다는 것이다.

 애나는 단지 한 명의 범죄자 일뿐이지만 어쨌든 직접적으로 그녀의 피해자, 간접적으로는 그 범죄자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매혹시킨 어떠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그녀는 기어코 넷플릭스 시리즈마저 만들어낸 사건의 주인공이다.) 극 중에서 그녀의 모든 범죄 행각을 알고 있는 제시카조차 그녀로 인해 혼란스러워한다. 그러한 점에서 제시카는 완벽한 윤리관을 가진 사람은 아니겠지만 또 결과적으로는 애나의 범죄를 가장 잘 취재한 훌륭한 저널리스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그러하지 않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우리들도 선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우리도 엄청나게 정의롭거나 각자의 직업에 대해 대단한 직업의식을 지녔거나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난 그렇다. 우리는 선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을 선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선함의 매력도 상당하지만,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아닌 매력의 한 포인트일 뿐이다. 그것을 판단하는 우리조차 우리 모두 선함과 악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호감을 사고 또 어떤 이들은 우리를 싫어한다. 우린 특별한 잘못이 없는 상대에게 비호감을 느끼면서도, 나에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에게조차 호감을 느끼곤 한다. 가끔은 괜스레 미운 사람의 나와는 무관한 무단횡단이 호감 있던 지인이 나에게 빌려간 돈을 갚지 않는 것보다 괘씸할 때가 있다. 단지 그것에 대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납득할만한 이유를 덧붙일 뿐이다. 그 사람은 대화가 잘 안 통해서, 또 저 사람은 과거에는 나에게 잘해줘서 등등.

 분명 이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 언급될만한 작품성을 가진 시리즈는 아님은 확실하다. 범죄 미화나, 미국의 법으로 금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범죄자인 애나에게 돌아갈 이익들(경제적 이득이든 아니면 이 작품이 다시 불러올 그녀에 대한 관심 그 자체든.)에 대한 거부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가 그 지점에 대해서 어느 정도 경계감을 가지고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가끔 우리나라의 범죄 관련 콘텐츠나 리뷰들을 보면 범죄 미화나 범인에게 어떠한 과거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금기되어있나 생각될 정도다. 당연히 어떠한 범죄자라도 그들을 위한 변명이 있어야 할 필요도, 의무도 없지만 나는 오히려 어느 악인에 대해 어떠한 이유도 없이 완성된 천성적인 악마성만을 강조하고 이에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로 대상화하는 것을 더 조심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스스로가 지닌 선함과 악함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고민할 기회는 오히려 <애나 만들기> 같은 이야기들이 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러한 악함에 호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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