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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Nov 05. 2024

고마운 파리의 안경 가게 아저씨

최악인 것만 같은 상황이 인생에 달달함을 얹어줄 때가 있다. 2007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연말, 파리. 말이 안 통하는 도시에서 혼자 하는 첫 여행이었다. 가레 뒤 노르, 북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경찰서를 찾아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런던에서 새벽 기차를 하나 놓치고 다음 유로스타로 파리에 넘어온 터라 매우 고단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도착하자마자 카페로 향했다. 라테를 주문하고 지갑을 꺼내려 가방을 뒤지는데 아무리 찾아도 지갑이 보이지 않는다. 순간 화장실 앞에서 한 남자와 이상하리만큼 긴 눈맞춤을 한 장면이 슬로우모션처럼 떠올랐다. 라테를 취소하고 카페 밖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깜깜한 유스호스텔에서 렌즈를 찾다 포기하고 나온 바람에 눈앞이 모두 흐릿했다. 막막한 내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전날 밤, 가지고 있는 유로를 모두 지갑에 넣었다가 혹시 몰라 반을 갈라 가방 한구석에 넣어둔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잘했어, 어제의 나.’ 그래도 신고는 해야 했다. 역 안에 경찰서로 보이는 푯말을 보고 망설이다 들어갔다. 프랑스어와 담을 쌓아온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경찰이 나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내 상황을 가장 쉬운 영어로 설명해야 했다. 잘 전달이 되었는지 전화기를 내민다. 카드를 분실하면 전화하려고 미리 수첩에 적어두었던 전화번호를 실제 누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누를 필요가 없었다. 국제전화가 되지 않는 전화였다. 


역에서 나와 토론토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돈도 없고, 말도 안 통한다며 우는소리를 했다. 그러자 유럽은 식자재가 비싸지 않으니 마트에 가서 끼니를 떼우며 버티라는 아주 맵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다. 꼭 엄마에게 등짝을 맞은 것 같았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긴 자로 발바닥을 한 번 때린 게 전부인, 등짝 스매싱이라는 건 모르는 엄마지만. 아무튼. 정신을 차리고 마트에 가서 저녁으로 먹을 바게트 샌드위치를 하나 샀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따뜻한 조명 아래 저녁을 먹으며 오손도손 이야기하는 한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 있는 엄마, 아빠, 남동생이 보고 싶어졌다. 머릿속에 그려온 크리스마스의 로맨틱한 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을씨년스러운 파리의 겨울 날씨도 한몫했다.


다음 날, 역 안에 있던 ‘그 카페’를 다시 찾았다. 그때만 해도 커피 맛을 모를 때였는데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처한 상황만큼 쓰디쓴 커피를 조금씩 마시고 있는데 한 남자가 옆에 와 앉는다. 자신을 레바논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서로 다른 언어로 말했는데 신기하게도 대화가 됐다(고 느꼈다). 지갑을 잃어버린 외국인을 안타까워하던 눈빛이 기억난다. 프랑스어를 하는 그에게 ‘렌즈’를 프랑스어로 적어달라고 했다. 


프랑스 단어 하나가 적힌 종이를 들고 숙소 근처에 있는 안경 가게에 들렀다. 머리숱이 없고 안경을 쓴 중년의 남성이 손님을 맞이한다. 프랑스어를 못하는 손님이라는 것을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에 일부러 봉주르, 대신 헬로, 라고 인사했다. 그러자 천천히 이야기해주면 알아들을 수 있다고 안심시켜준다. 며칠만 쓸 렌즈를 한 쌍만 사고 싶다고 말했더니 시력을 재고 금세 박스 하나를 뜯는다.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서 지금은 토론토에서 공부하는 중이지만 한국에서 왔다고 답했다. 안경 가게 아저씨는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가더니 메일 하나를 열어 보여줬다. 김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 보낸 메일이다. 한국에서 프랑스에 안경을 수출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낯선 것 투성이인 타지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 반가웠다. 그만큼 너덜너덜했던 당시의 상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자 안경 가게 아저씨는 한국에서 수입했다며 메인드 인 코리아 안경도 써 보였다. 반가워하는 모습이 눈에 띈걸까. 가게 뒤 창고로 가더니 파란색 작은 상자를 들고나온다. 그러고는 에투알 개선문이 들어있는 크리스탈 조각을 기념품이라고 건네준다. 


생각지 못한 호의에 어제부터 파리 여행이 녹록지 않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계산대로 가더니 방금 낸 10유로를 다시 꺼내온다. 아니다, 이것마저 받을 수는 없었다. 한사코 거절하자, 10유로를 돌려주러 파리를 꼭 다시 찾으라 한다. 저녁을 대접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러면서 파리를 다시 생각하게 된 말도 덧붙였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같이 올 때가 있어. 그러니 절대 실망하지마.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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