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녀>의 후속편이 크랭크업 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고 그동안 박훈정과 <마녀>에 대해 생각했던 부분을 글로 정리해본다.
영화의 개봉 후 인상적이었던 것은 트위터에서 “그동안 이런 서사를 남성만 즐기고 있었다니 억울하다”라는 논조의 글에 열화와 같은 리트윗이 있었던 것이다. 무적의 히어로가 악을 물리치는 대중에게 익숙한 장르영화가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다는 것은 최신 영화들의 경향만 살펴보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폭력성이 가미된 히어로, 액션 영화에서 여성 주연이 차지하는 비율이 증가했다고는 하나 주류라고 볼 수 없고, 더불어 성적대상화 없이 묘사되는 캐릭터는 그 비중이 극소수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여성 히어로가 거의 전무했다는 점이 <마녀>가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확실히 영화는 신인 여배우를 기용하고 극중 여성에 대한 혐오적이거나 성적으로 대상화 하는 묘사를 가장 최소화하였으며 주요 인물은 모두 여성이었다. 이 점에서 박훈정의 전작들에 비해 가히 유의미한 페미니즘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남성 배우들은 그 존재감이 거의 전무하거나 소모적으로 이용되는 듯 보인다. 심지어는 이질적으로 느껴지기까지한 남성 배우를 소모하는 방식은 박훈정의 전작 <V.I.P>에 가해진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신호로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마녀>는 성별의 전복 외에는 별다른 노력 없이 ‘히어로의 탄생’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충실히 차용했다는 것이다. 실험체가 되어 인간 병기가 된 히어로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익숙하다. <마녀>의 안일함은 여러 면에서 기만적인데, <마녀>가 대중으로부터 환호 받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박훈정의 전작 <신세계>, <V.I.P> 를 통해 받았던 비판을 고려한다면 매우 변명적인 영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V.I.P>는 불필요하고 과도한 여성 신체훼손에 대한 묘사들로 여성혐오 논란을 빚었으며 그로 인해 전작 <신세계>, 그리고 각본을 작업했던 <악마를 보았다> 까지 박훈정이 빚은 여성혐오의 역사와 계보를 훑어보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특징적인 것이 있다면 <마녀> 이전까지의 박훈정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은 거의 살인의 대상이 되거나, 피해자이거나, 성적 대상화가 되거나, 캐릭터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대사만 내뱉는 도구처럼 쓰여진다는 점이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박훈정이 여성 캐릭터를 대하는 방식은 결국 죽이거나 삭제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느끼기에 여성은 절대로 자신이 이해불가한 미지의 존재이기에 감당불가하기 때문. 그렇다면 박훈정은 어떻게 <마녀>를 만들 수 있었는가? 기존에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남성 캐릭터에서 성별만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인공 자윤은 동성 친구이자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는 명희와 함께 다닌다는 점 외에는 특별히 ‘여성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장면이 극히 드물다. 인터뷰에서 고등학교 여학생이 서로 어떻게 대화하는지를 알기 위해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버스 정류장을 서성이던 적이 있다고 밝혔던 박훈정은 실제 그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듀나가 짚은 부분과 무언가 교차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여성은 이럴것이고 여고생은 이럴것이다. 라고 환상을 품었던 것이 깨어질 때 받은 충격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박훈정은 여지껏 그가 걸어온 작품에 가해진 비판에 대한 피드백으로 여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반성을 통한 영화적 반영이라기보다는 그저 여성 배우를 기용함으로써 여성 혐오 논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쯤에서 앞서 거론되었던 트위터에 대해 다시 질문 던져볼 필요가 있다.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가학적인 폭력, (그것이 무적의 히어로가 악당에게 가하는 폭력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통쾌함과 페미니즘으로 결부시켜 이해할 수 있는가? 박훈정은 그저 남성이 여성에게 가했던 폭력을 아무런 고민의 흔적 없이 성별만 뒤바꾸었다는 것만으로 기대이상의 큰 환호를 받았다. 물론 박훈정은 <마녀>의 사례를 통해 그가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범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인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폭력묘사를 보는 관객 여성들이 변명과 책임 회피와도 같은 이 영화를 환호하며 받아들였다는 지점에서는 부분적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논의를 생각하게 된다. 박훈정은 여성에 대해 깊이있게 이해 가능한 인물이 아니며 따라서 영화도 그 지점을 반영한다. 그는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에게 “여성” 히어로가 어떤 존재의의를 갖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의 입장에서는 여타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이 악당을 물리치기만 하면 그가 받았던 비난을 탈피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여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잔혹한 폭력은 진정 현실에서 보기 극히 드문 사례이다. 그것이 <마녀>가 간과한 지점이다. 어떤 면에서 <마녀>는 완전한 판타지 영화다. 박훈정이 생각하기에 여성이 남성을 쉽게 몰아붙이고 폭력을 가하는 것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는 판타지와도 같기에 현실적인 설정이 아니라 뇌가 조작된 인간병기, 돌연변이 인간이라는 성질을 부여한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마녀>의 기만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영화의 속편을 기다리거나 여전히 애정을 가지고있는 반응을 살펴보면, 한국의 여성 관객이 얼마나 이런 여성 히어로물에 굶주리고 있었는지에 대한 척도로 이 상황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여성 히어로는 누구인가? <마녀>의 히어로가 보여주는 영웅성과 대척점의 위치에 있는 <벌새>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현실의 삶에 발 디디고 살아가는 중학생 은희의 인생을 다룬다. 중학생의 삶도 영웅이 될 수 있는가? 94년도에 중학생 은희는 막내딸로, 부모로부터 그럭저럭 애매하고 때때로 방치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란다. 모자란 사랑을 남자친구나 친구와의 관계에서 채우고자했던 은희는 한문학원에서 만난 영지선생님과 유대를 쌓게 되고 그녀를 동경하며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싶어한다. 그것은 영지도 마찬가지이나 성수대교 붕괴라는 사고로 둘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다. “어떻게 그 큰 다리가 무너질수가 있니?” 찾아간 영지의 집에 그녀의 엄마가 말한다. 세상이 이상하다. 있을 수 없는 일들, 있어서는 안된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우리 곁에서 매일 일어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참 아름답다.’ 영지는 은희에게 맞서 싸우고 절대로 지지말라고 이야기 한다. 툭치면 쓰러질것만 같은 사람이 나긋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하는 장면은 은희에게 씨앗이 된다.
은희는 여전히 오빠에게 뺨을 맞고 고막이 찢어진다. 영지선생이 없어도 은희는 여전히 살아가야한다. 세상은 아직도 혼란하고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은희는 살아야만 할 것이다. 산다는 것 만으로 은희는 영웅이 될 수 있고 살아가는 여성 모두 자신만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태도가 오히려 <마녀>의 그것보다 옳은 방향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