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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lmz error Sep 15. 2021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론


히로카즈의 영화는 어느쪽으로든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내가 가장 깊이 이해하는 말이자 가장 싫어하는 말이 "사람은 그럴 수 있어" 인데, 우리는 인간이기에 완벽하지 않고 때때로 뒤틀리고 수많은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지성을 갖춘 고등생물임을 너무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가치판단은 내리지 않지만 서사 속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삶의 진실을 스며 놓는다. 우리의 오만함에 경종을 울리는 것 처럼.


이들은 서로를 '선택한 가족'으로 부르며 그들간의 유대가 더 깊을 것이라 믿는다. 그것은 일부는 진실이다. 그러나 일부는 진실이 아니다. 만비키 가족은 철저히 서로의 이점을 이용하고 또 숨겨주며 자신의 안위를 보존한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한다. 그들간의 관계 속에는 무언가 '보통 이상'의 다른 것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자잘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드러난다. 할머니의 연금과 모아놓은 돈으로 먹고 살기 위해 가족들은 할머니를 부양한다. 그리고 그런 발언을 가감없이 내뱉는다. 쇼타와 새로운 가족 '린'에게도 도둑질을 가르쳐 가족의 생계에 도움이 되어야 부담갖지 않고 지낼 수 있음을 가르친다. 그러나 아빠는 사실 도둑질 외에는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이 없었다. 진정한 '아빠'가 되고싶었던 그가 사력을 다해 교육할 수 있는 것은 도둑질 뿐이었다. 좀도둑질을 가르치는 것은 이익집단과 가족집단에 동시에 소속되는 이중성을 지니는 행위가 된다.


쇼타는 그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다. 그를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을 힘겨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범죄자 출신 부부와 달리 쇼타의 천성은 전혀 다른 것이었기에 사춘기가 시작될 나이에 접어들자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쇼타는 자신의 행위를 '린'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한다. 쇼타는 이제 기형적인 가족을 지속하는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일부러 잡혀버린다. 사건 이후, 쇼타는 자신을 버리고 도망치려 했는지 묻는다. 남자는 자신이 쇼타의 아버지가 되기에는 역부족임을 인정하고 이제는 아저씨로 돌아가겠다고 얘기한다. 떠나는 버스에서 쇼타는 나지막이 그를 '아빠'로 부르지만 영영 남자에게 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들의 '가족적' 모먼트를 조명한다. 부대껴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가장 익숙하고 또 대표적인 가족적 행위다. 영화는 함께 먹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지역 어딘가에서 진행되는 불꽃축제를 다함께 모여 소리만 듣는다던가, 바다에 놀러갔을 때 할머니의 시점으로 비치는 그들은 영락없는 가족 그 자체다. 영화는 질문한다. 사회적 규범과 별개로 경계 바깥에서 가족이 된 이들을 우리가 너무 쉽게 속단하는것은 아닌가? 특히 린(쥬리)를 통해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무엇이 쥬리에게 더 행복한 삶일 수 있는가?


그러나 히로카즈는 경계밖의 만비키 가족의 형태 역시 긍정적으로만 조명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은 일종의 폭력이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에 익숙해진 집단. 그 안의 매커니즘은 적어도 유년시절 성장하는 동안 개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매커니즘에 순응할것을 강요한다. 아키는 할머니가 복수심에 자신을 거뒀는지 순수한 사랑으로 품었는지 진실을 알지 못한채로 본래 있던 집으로 돌아온다. 알면서도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곳. 그것이야말로 가족의 힘이자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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