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최명희 문학관 방문, 작가의 혼신의 힘이 느껴져 눈물이 왈칵
15일, 아침 일찍 전주역에 도착했다. 『혼불』 10권을 완독 한 기념으로 최명희 문학관을 찾은 것이다. 국어 교사였던 작가는 수많은 순우리말 단어를 사용하여 1980년부터 1996년까지 무려 17년간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나는 도서관을 다니다 우연히 제목에 이끌려 읽기 시작했다. 혼불 첫권을 읽으며 많이 놀랐다. 아름다운 문장이 마치 혼을 불러들이는 주술처럼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아쉽게도 혼불은 작가의 죽음으로 미완으로 남았다.
혼불의 줄거리 이 소설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일제강점기 시절 전북 남원 매안 마을의 양반인 청암 부인은 남편과 시아버지가 없는 종가의 종부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양자를 들이고 집안은 물론 마을을 이끌며 헌신한다. 이후 손자 강모를 나이 많은 효원과 결혼시켜 대를 이으려 하지만 그는 강실이를 마음에 둔 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징병과 구설수를 피해 만주로 떠난다. 병으로 청암 부인이 죽자 거멍굴의 상민들은 양반들에게 저항한다. 신분을 높이려는 야망이 있는 춘복은 강실을 범하여 아이를 임신시키고 효원도 홀로 아이를 낳고 문중을 책임지게 된다.
역사 이야기를 하는 부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글이 시처럼 읽혀 자꾸 반복해서 책을 펼치게 됐다. 또한 옛 결혼풍습이나 장례문화에 대해 자세하게 쓰여있고 만주에서 고생하던 조선인들의 삶도 이해하게 되었다. 더 알고 싶어 전주에 있는 문학관으로 향했다.
전주역에서 혼불의 주인공 강모를 만나다
파란 하늘 위로 살짝 들어 올려진 전주역의 검은 처마를 보니 혼불 8권에 나오는 ‘궁문 같은 골기와 검은 지붕’라는 묘사가 생각났다. 이곳에서 주인공 강모는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해 만주로 떠났다. 잠시 그 모습을 그려보며 주인공의 독백을 되새겨 보았다.
“그 한순간을 끝끝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나는 점에 불과한 시간의 티끌을 순간으로 흘려버리거나, 지워버리거나, 없애버리지 못하고, 이처럼 전 생애를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 채, 낯선 땅, 낯선 시간, 머나먼 곳으로 떠밀리어 흘러온 것일까.”(8권 P.145)
처음에는 주인공이 왜 이리도 유약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가문을 지켜야 하는 책임과 상민들의 평등에 대한 열망을 모른 척할 수 없어 갈등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문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자와도 인류의 평등을 외치지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거칠고 무도해지는 사람들과도 함께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강실이와 청암 부인을 그리워하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강모를 미워하지 않는다. 대신 안쓰러움을 가득 담아 강모의 마음을 헤아린다.
“강모의 얼굴이 슬프게 기울어졌다. 희미한 촉광의 전등 불빛이 강모의 검은 얼굴을 쓰다듬듯이 흘러내린다.”(4권 P.61)
음식점들을 보니 전주 교동 녹두묵이 떠올라
한옥마을은 입구부터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듯 작은 전돌이 바닥에 운치 있게 깔려 있었다. 거리에는 한복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요즘은 남학생들도 여자 한복을 입는 것이 유행인 듯했다. 뒷모습이 아름다워 쫓아갔다가 앞에서 남자인 걸 알고 깜짝 놀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들어가니 먹거리가 가득한 골목이 나왔다. 소설 속의 음식 묘사를 한 부분이 떠올랐다.
“음식이라고 하기에는 애련하다 할까, 난들 난들 묵채를 썰어서 가지런히 놓고 파, 마늘, 참기름에 고춧가루, 깨소금 갖은양념을 다하여 섞은 간장을 얌전하게 얹거나, 다른 음식 웆저지로 살짝 몇 닢 고명 올릴 때, 자칫 스러질까, 먹기도 전에 바라만 보아도 입안에서 녹아 버리는 전주 교동 녹두묵.(8권 P.111)”
글을 읽으면서 웃음이 피식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음식을 표현하는 말에 장단이 있다. 이렇게도 정성을 들인 작가는 녹두묵을 많이 좋아했을 것 같다.
수령이 600년이 된 은행나무
은행나무 길에는 아주 귀한 나무가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 월당 최담 선생이 귀향한 후 후진 양성을 위해 학당을 세우면서 심은 거라고 한다. 은행나무는 벌레가 슬지 않는 나무로 유생들이 부정에 물들지 말라는 뜻에서 향교에 심었다고 한다.
수령이 600년 된 큰 나무 작은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오래된 은행나무의 뿌리에서 작은 은행나무가 올라온 것이라고 한다. 자식이 있는 은행나무라니 신기하였다. 1998년 12월에 작고한 최명희 작가는 이 작은 나무는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소설 속에는 은행나무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우람한 은행목들이 몇 백 년 수를 자랑하며 밀밀하게 서 있는 향교, 그리고 전주 부성이 아끼는 팔경 중에 하나로 꼽히는 한벽루”(1권 P139)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고 있는 초록 잎의 은행나무 아래서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작은 소원을 빈다고 한다. 나도 한 가지 바람을 속삭여 보았다.
꽃심 최명희 문학관
은행나무길에서 경기전 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와 최명희 문학관에 도착했다.
문학관 입구에는 글을 쓸 때 작가의 마음이 철제로 세워져 있었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마디 한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혼불이 여전히 모국어의 바다로 불리며 사랑받는 이유는 그녀의 깊은 고민과 치열한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문학관에는 아담한 뜨락과 독락재(獨樂齋)라고 새겨져 있는 건물이 있었다.
‘홀로 있어도 즐거울 수 있다’라는 뜻의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니 최명희 작가 생전 모습이 녹화된 영상이 화면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다.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습니다. 제 몸의 심장을 도려낸 상처를 숨기지 않고 이마 높이 붙일 때 가장 큰 힘을 얻는 방패연처럼”(후략)
작가는 고통스러운 고독의 순간을 견디고 자신만의 작품을 창작을 하는 순간 희열을 느낀다. 산더미 같은 원고지를 쓰고 다듬으며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의 정신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완성한 그녀의 작품과 함께하며 한참 동안 가슴이 먹먹해졌다.
독자들이 필사한 원고지가 탑처럼 쌓여 있었고 그녀의 작품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겨울쯤 다녀간 듯한 어느 독자의 필사를 읽어 보았다.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천지도 희어, 한없는 고적을 오히려 서로 비추어 주는 밤은 그래도 얼마나 화려한 것인가.”(5권 P.39)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인 밤, 달빛에 비치는 눈을 밟고 서서 거무스름한 허공에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그려보며 웃었을 작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독락재를 나오니 살랑이며 부는 바람에 풍경이 맑은 소리로 말을 걸듯이 소리를 냈다. 잠시 뜨락에 앉아 데이지꽃 위에서 춤추는 나비를 바라보고 밖으로 나왔다.
경기전은 19일까지 무료개방
최명희 문학관에서 불과 5분 거리의 경기전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국내외 관광객으로 붐볐다. 입구에는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새롭게 출범하여 19일까지 무료개방한다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경기전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드라마로 많이 제작되었던 이야기인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과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러한 이야기도 최명희 작가의 손끝에서 다시 써지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조들의 옛 모습 떠올리며 다시 전주역으로 하는 길에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혼불의 문장을 읊으며 우산을 펼쳤다.
“진종일 낮은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던 하늘은, 구름이 가린 볕뉘마저 스러지는 저녁이 되면서, 그 젖은 갈피에 어스름을 머금어 스산하게 어두워지는데 하늘은 마치 아득히 펼쳐진 전지의 회색 창호지 같았다. 아니면 담묵을 먹인 거대한 화선지라고나 할까”(혼불4 P.151)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제보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