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일 작가의 <나를 위로해주는 것들>
이병일 작가는 젊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훨씬 윗세대에 있을 법한 이야기라서 이렇게 첨언을 하게 된다.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은 이병일 작가의 첫 산문집이다. 그동안 작가는 『옆구리의 발견』, 『처음 가는 마음』 등 다수의 시집을 발표했다.
풍경이 신화가 되게 만드는 상상력
시인의 글은 평범한 일상을 신화 속 이야기처럼 신비하게 흘러가게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섬진강 물결 따라 진안에서 펼쳐지는 소박한 생활은 고난과 궁핍이 아니라 신비와 강렬함이다. 그래서 집을 에워싸고 있던 담장도 장터에 가는 시인을 따라왔다가 “괜히 왔다 간다”라고 고분고분한 백구 꼬리에 붙어 다시 집에 돌아오기도 한단다.
밤나무 안에 벌집을 만든 여왕벌은 한 여름밤 외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 도깨비처럼 영혼의 세계를 넘나드는 듯 신묘한 힘이 있다.
마을에 있는 밤나무 숲에서 가장 늙은 나무는 죽음이 가까워져 속이 비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빈 공간에 벌집이 생기면서 나무는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어느 날 어머니가 알밤을 주워오셨다. 작가는 그 벌집을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달항아리는 조선백자로 눈처럼 흰 바탕색과 둥근 형태가 보름달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집에 놓으면 좋은 기운이 순환하여 풍요와 복을 불러온다고 한다.
“밤나무에 귀를 대면 아주 작은 숨 혹은 자글자글 꿀 녹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나무는 달항아리 하나 들여놓기 위해 백 년이 걸린 셈이다. 제 영혼을 벌 떼의 날갯짓 속에 송두리째 담아내기 위해 검은빛 거울 속으로 빠져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p.19)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같은 ‘옛날 옛적에’
작가는 진안고원이 있는 덕태산에서 자랐다고 한다. 뱀을 손으로 잡고 벌통집을 쑤시고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단다. 그러다 말벌들한테 쏘여 죽을 뻔했는데 서까래 밑에 짚을 태워 몸에 바르고 살아났다고 한다. 굼벵이의 똥오줌이 독을 완화시켜 주었다는데 이런 이야기를 80년 생이 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필자도 부모님이 일찍 귀농하셔서 시골살이를 조금은 안다. 그래도 토박이 정서하고는 많이 다를 것이다. 특히 작가는 돼지를 직접 기르기도 했는데 아기 돼지가 얼마나 예쁜지 알고 있어 읽는 동안 흐뭇했다.
“우리 집 돼지들은 분홍빛이었고, 지푸라기 덤불을 좋아했으며 코를 흥얼거리면서 음악을 들을 줄도 알았다. 일광욕도 할 줄 알았다. 멋진 돼지들과 함께하면 나도 멋진 기분이 들었다. 그 누구보다 나랑 통했던 동물들은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줬다. 그렇게 나는 돼지 아닌 돼지의 오빠나 형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p. 218)
작가의 어머니는 열아홉에 시집와서 섬진강을 떠나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강가에서 재첩을 잡으셨다고 한다. 작은 조개처럼 생긴 재첩은 청양고추와 소금만 넣고 끓여도 국물이 일품이다. 그렇게 국을 끓여 가족들 밥상에 놓고 아버지의 기침이 잦아들게 하고 동짓날에는 가마솥에 팥죽을 끓여 가족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셨다.
“살가죽과 눈꺼풀이 주는 잠을 이겨내면서, 어머니는 물속에서 침묵하는 법으로 아이를 낳았다. 봄빛이 자리를 그늘 쪽으로 옮겨 앉듯 어머니는 세상에 나가는 법을 강물 속에서 익혔다.” (p. 32)
작가의 아버지는 엄하신 분으로 혼도 많이 내셨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가 장난기가 많아 자주 다쳤다고 한다. 작가는 사랑이 있으니 혼내는 것이고 그 말은 가장 쉽고 어려운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따뜻한 재로 변한 아버지가 언제라도 찾아주셨으면 하고 바란다.
농가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는 칡소를 아버지는 무척 아끼셨다고 한다. 칡소가 죽으면 기꺼이 장계를 치러 줄 것이라고 말하는 아버지는 칡소가 혀로 얼굴을 핥아도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사람이 그리운 골짜기에 같이 숨 쉬고 있는 자연은 사람보다 더 다정한 친구가 된다.
“아버지는 지리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죽으면 물비늘이 된다고 믿었다. 또 그 물비늘이 연어의 몸에 들어가면 다시 모질고 독한 생명붙이로 태어난다고 믿었다. 나의 가계는 저 지리산 물줄기에 떠내려가지 않는 구름에 숨어있다. 할아버지는 구불구불한 강가를 떠도는 누더기 구름이 되었고, 할머니는 물비린내 야금야금 갉는 먹장구름이 되었다고 했다.” (p. 37)
자연 속에서 위로받기를 바라는 마음
작가는 자연은 서로 공생하는 법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싸우고 다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란 걸 안다. ‘한 수 위’에서 기린은 아카시아 나뭇잎과 꽃을 먹는다. 그래서 아카시아 꽃은 달콤한 꿀로 불개미를 불러들인다. 불개미는 기린의 얼굴에 올라타 기린을 괴롭히지만 기린이 먼 곳까지 데려다 주니 힘들게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진리를 배우게 된다.
“그러니까 어디선가 서 있을 그것처럼 어디엔가 있을 그것처럼 덕분에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그것처럼 안간힘이 되고 후생에 대한 아름다움과 어스레한 파국이 더해지는 갈등을 나는 한 수 위라고 부른다.” (p. 50)
이병일 작가의 이야기는 아름답다. 수렁에서 생명을 끄집어내는 이야기꾼이 되기로 마음먹었다는 이 작가의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태어난 곳이 산촌이나 어촌이라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자연이 빚어내는 마술 같은 이야기를 언제든 들으며 편안히 쉴 수 있으니 말이다. 고향은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 이 이야기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말벌에 쏘여 죽을 뻔한 소년이 풀어놓는 신비로운 이야기 - 오마이뉴스 (ohmy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