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때였다. 상급학교 진학 준비에 도움이 될까 봐 집을 떠나 이모네로 거처를 옮겼다. 덕분에 한 시간가량 걸리던 등교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그 시간만큼 알뜰하게 잘 활용해서 공부에 집중해 주길 바라는 부모님의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뜻에 제대로 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낯선 풍경과 이야기들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쯤 친절함과 진심으로 다가온 친구는 한마디로 '소녀시대' 표지에 나서도 손색없다 싶을 만치 내게는 예쁘게 보이고 아는 것도 많았다.
집에서 키운 채소 위주의 우리 집 식단은 줄곳 입맛이 까다로웠던 나로 하여금 편식을 하게 했다. 입에 맞고 안 맞고의 식사량이 다를 정도였다. 그러던 내게 이모집의 음식은 달짝지근하거나 맛깔스러운 밑반찬 위주여서 참 좋았다.그런데 친구는 호기심이 많고신문물을빨리 받아들이는 데에 반해음식은 그렇지가 않았다. 상추쌈,배춧국,강된장과무엇보다 열무가 주 재료인 반찬을 좋아했다. 공부하다가심심하면 건빵을 물에 말고는 물김치와 먹거나 나물이 가득 들어간 양푼이 비빔밥에다볶음밥도 곧잘 해서 먹곤 했다. 무엇보다 가을바람이 불 무렵 꽃 단지에서 익힌 열무김치가 단연 최고였다. 풋내가 살짝 나긴 해도 잘 버무려진열무김치 앞에서는나도 몰래 수저가 빨라지곤 했다. 김장김치만 알던 내게는 한마디로새로운 발견이었다.
그 후 고등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 자취할 무렵에는 직접 밥을 해 먹어야 했다. 집에서 반찬이 올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들고 온 야채를 익혀먹다가 어느 날 주인아주머니로부터 도움 받아가며 직접 김치를 담았다.
김장김치와 달리작은 양의 소금으로 살짝 절이는 게 관건이었다. 또한 양념을 만들 때도 밀가루 풀을 쑤거나짓뭉갠 밥풀물에다멸치 액젓과홍고추를 짓찧어서 넣었다. 그런 양념을 골고루섞은 뒤에 얼마간 발효시킨 열무김치는 여름 한철 자주 밥상에 오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입맛조차 서서히 바뀌어 갔다. 그제야 또래들보다는 늦었지만 키도 커져갔다. 어쩌면 친구가 좋아한 열무 덕분에 편식에 치우쳤던 식성마저 바뀌게 했다. 삶에의 변화는 작은 것에서 출발하기도 한다는 것을 새삼 떠올려보며 또다시 힘을 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