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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스이 Aug 17. 2021

이 세상 모든 가족들을 위한 고백

도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리뷰

0.

군대 시절, 내 가치관에 정말 큰 영향을 미쳤던 인생 드라마 콜드케이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은 이야기가 바로 시즌 4의 첫 에피, RAMPAGE였다.


이 에피소드는 한 쇼핑몰을 순식간에 피바다로 만든 두 소년의 총격씬으로 시작된다. 캠코더 연출 덕분인지, 평화롭던 주말 오후가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변하던 그 지점에서 나는 더할나위 없는 현실감을 느꼈고, 모티브가 되는 실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인터넷을 검색했다. 바로 이 계기가 나와 1999년의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동 사건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그 콜럼바인 사건의 범인 중 하나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쓴 에세이다.


1.

콜럼바인. 99년 이래 이 사건은 총기난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로부터 8년 뒤, 콜럼바인에 영감을 얻은 대학생 조승희가 버지니아 폴리텍을 피로 물들였고, 2012년에는 오이코스 대학, 샌디 훅 초등학교의 학생들이 죽었다. 세세한 부분은 다를지라도 이 모든 학교 테러의 뿌리로 평가받는 것이 바로 콜럼바인이다. 그만큼 이 사건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아마 '학교를 테러한 학생', 그 사실이 주는 충격 때문이리라.


비유가 온당할지 모르겠으나, 그러니까 우리 정서로 치면 조승희나 유영철의 가족이 책을 써낸 격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이 한국에까지 출간된 사실이 참 놀라웠고, 이 책에 대한 미국 본토의 평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에 두번 놀랐다. 나로서는 콜드케이스 rampage 이후 간만에 다시 접한 콜럼바인이었다. 1999년 이래 근 20년이 다되가는 시점에 이 엄마는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길었던 세월을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게 너무도 궁금했다.


2.

물론 [가해자의 엄마]라는 표현에서부터, 이 책이 어떤 방향을 지향할 것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분명 아들이나 자신에 대한 변명이 주가 될거라고. 도서를 다 읽은 지금 시점에서 봐도 큰 줄기에서 그런 부분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이 책을 달랑 '가해자 부모의 변명' 한 마디로 퉁치는건 아깝다. 아니 아까운 정도가 아니라, 이 책에 담긴 귀중한 가치를 그런 속단으로 훼손하고 싶지 않다.


본서가 담은 최고의 가치는 바로 진정성이다. 수 클리볼드는 정말 솔직하고 상세하게 아들 딜런과 보냈던 날들, 그리고 1999년 이후 자신이 보낸 수십년에 대해 써냈다. 자신이 어떤 부모였고 딜런이 어떤 아이였는지를 시작으로, 사건 전에 딜런에게 어떤 징후가 있었는지, 자신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심지어는 범행 과정을 포함해 가장 감추고 싶었을 딜런의 치부와 사건 직후 본인의 부적절한 처신에 이르기까지, 수는 사건과 관련된 모든 것을 썼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전해지는 것은 더이상 가해자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아니라, 또 다른 '딜런'을 막기 위해 진심으로 분투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다. 아들이 피해를 끼친 가족에게도, 아들의 가족인 자신에게도 모질었던 지난 세월을 굳이 책으로 담아낸 이유, 그것은 변명이 아닌 기여를 위함이었다.


이미지 출처: 2020conservative.com


3.

가장 소름이 돋았던 순간은 바로, 수와 딜런 가족이 우리네 일반 가정과 똑같이 평범했다는 점이다. 가정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딜런에 대한 주변의 평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사건 이후인 현재까지도, 딜런의 친구들은 수 클리볼드 가족과 연락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말을 접하게 되면 "또 이런 얘기냐" 싶은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근데, 그렇게 어설프거나 작위적이지 않다. 비판과 의심의 마인드로 책을 읽으면서도, 끝엔 정말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


아무리 가족이 사랑을 주고, 그 사랑을 받는 딜런조차 자기 가정이 남들보다 좋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그에겐 그것만이 전부가 될 순 없었다. 수 클리볼드의 이야기 중에 왜 딜런이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나름 짐작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 또한 추정에 불과할 뿐이다. 부모인 수 역시 지난 17년간 그 '왜'를 알기 위해 노력했고, 이 책엔 그 노력의 흔적이 곳곳에 있지만, 그녀조차 명확한 요인을 알기란 힘들었다. 하지만 이 책의 진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명확한 요인은 없지만, 수 클리볼드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리한 이야기들, 그리고 범죄/의학 전문가들의 견해에서 드러난 간접 요인들은 모두가 하나의 위험 신호였다.


4.

"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구체적인 미래 계획을 세우는 일은 드물지 않다. 죽은 사람이 최근에 차를 샀다거나, 크루즈 여행을 예약해놓는다거나 했기에, 남은 가족들은 이를 도무지 믿기 어려워한다. 어떤 경우에는 자살 경향을 감지한 가족이나 친구의 염려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당사자가 일부러 이런 계획을 세우고 알리기도 한다.(중략)


혹은 이런 계획들이 바로 자살성 뇌를 지배하는 '망가진 논리'의 징후일 수도 있다. 자해 충동을 가진 사람은 카리브해로 휴가를 떠날 것이라는 현실과, 떠나기 전에 자살할 것이라는 현실 두 가지를 동시에 믿으며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딜런이 신이 나서 대학 생활 계획을 세우는 동시에 총기 난동과 자살 계획도 세웠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72p)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절대 자살할 리가 없다'는 주변 지인들의 증언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비슷하다. 그렇게 친한 것 같아도, 사람 마음 속의 조용한 폭풍까지 알기란 힘들다. 아니, 누군들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수는 딜런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흉악한 범죄', '사람을 죽였다'는 표현을 가감없이 썼다. 그 날 딜런이 살인과 동시에 자살한 것은 익히 밝혀진 바다. 그럼에도 딜런이 수의 자식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따라서 수의 서술이 완전히 객관적인가에 매달리는 것은 의미가 없을 뿐더러, 주관적이라도 충분히 읽어볼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의 지향점은 '우리 애도 자살했어요'가 아닌, 똑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하기 위한 경험자의 읍소이기 때문이다. 


출처: columbinemassacre.forumotion.com


5.

지난 2014년, 결혼 43년만에 수는 남편 톰과 협의 이혼했다. 살다보면 이혼도 할 수 있는 것이라지만, 그들의 갈림에는 콜럼바인 이후를 대하는 두 사람 행동의 온도차가 자리하고 있다. 딜런이 드리운 그림자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하면서 상처가 되기보다,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힘이 되어주기로 했다고 한다. 이 책의 말미에도 수가 톰과 큰 아들 바이런에게 부치는 사랑의 메시지가 그대로 담겨있다. 그들에게도 더이상의 아픔이 없길 바란다.


6.

매체는 비극을 보여주는 경우는 많아도, 비극 이후를 보여주는 경우는 적다. 비슷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그나마 도움이 되는 것은 비극의 시연이 아니라, 비극 이후를 어떻게 살아갔냐는 점인데, 매체는 비극 자체만을 일종의 포르노처럼 소비한다. 하지만 수 클리볼드의 이 책은 비극 이후를 살아온 얘기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 당연히 가해자 부모와 피해자 및 유족들이 겪는 아픔의 무게가 동등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자식이 살인범이 되어 자살했고, 반평생을 자식이 남긴 죄를 정면으로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삶을 비극이라는 말 외에 달리 무엇으로 표현할까. 콜럼바인의 비극 이후, 전남편 톰이 조용히 사는 길을 택했다면, 수는 기여하며 사는 길을 택했다. 이 책 역시, 그 결과물 중 하나다.


7.

언제나 이런 책의 리뷰는 오만한 방관자의 입장으로 쓰이기 쉽다. 예컨대 '자신은 절대 같은 입장에 설 일이 없다고 확신하는' 류의 감상을 뜻한다. 솔직히 같은 입장에 서긴 싫다. 누가 그걸 원하겠는가, 글로만 읽어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얼마든지 수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와 나의 차이는 수가 위험신호를 놓쳤던 순간이 나에겐 아직 닥치지 않았다는, 딱 그정도 뿐일 것이다.


혹자는 이 책에 대해 '가만 닥치고 있을 것이지 어디라고 기어나오냐'는 독설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런 비판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어떻게든 자신이 틀린 부모가 아니었음을 말하고 싶은 욕망의 발로로 볼 수도 있을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사람의 마음을 그리 값싸게 보고 싶지 않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지점을 느꼈기에, 이 책은 끝내 버림 받지 않았던 것이리라. 세상 모든 가족을 위해 피눈물로 적신 이야기를 전해준 경험자, 수 클리볼드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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