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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스이 Sep 04. 2021

'귀멸의 칼날' 같았던 일본의 마지막 복수

1880년, 우스이 로쿠로 복수 사건

일본의 만화 작가 고토게 코요하루(吾峠 呼世晴)의 작품 '귀멸의 칼날'(이하 귀멸)이 인기다. 귀멸 극장판이 지난해 전세계 영화 흥행 수익 1위를 기록했고, 지난 4월 귀멸의 완결권인 23권은 (예약)발매 당일 기라성같은 베스트셀러들을 제치고 국내 대형서점에서 모두 판매 1위를 석권했다. 국내에서 만화책이 종합 부문 1위를 차지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메이저 언론에서도 수차례 보도할 정도였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만하다.


귀멸은 가족을 살해한 혈귀(도깨비)라는 악당을 상대로 살아남은 남매가 복수하는 내용이다. 남매 중 여동생 '네즈코'는 혈귀에 습격 당해 똑같은 혈귀로 변하는 시련을 겪고, 오빠인 '탄지로'도 혈귀에게 복수하기 위해 죽을 고비를 넘나드는 수련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두 남매는 여러 인연과 사건을 겪으며 더욱 강해지고, 결국 원수인 혈귀 '키부츠지 무잔'과 맞닥뜨리게 된다.


근데 과거 일본에선 실제로 이와 비슷한 복수극이 있었다. 1880년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우스이 로쿠로(臼井六郎) 복수 사건은 가히 근현대판 귀멸의 칼날이 따로 없다.


1. 11살·3살 남매에게 닥친 한 밤의 비극


비바람이 세차게 불던 1868년 5월 23일 오전 5시. 자택에서 곤히 자고 있던 우스이 로쿠로는 여동생 츠유(臼井つゆ)의 울음소리에 깼다.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동생의 울음소리가 평소와 달리 불길하게 느껴진 로쿠로는 방을 나왔고, 눈을 의심했다.

귀멸의 칼날/고토게 코요하루·슈에이샤


툇마루에는 머리카락이 붙은 살점과 피묻은 뼛조각이 곳곳에 붙거나 떨어져 있었다. 주변에 낭자한 피가 아니었다면 그게 무엇인지 알기도 어려웠을, 보고 있는 지금도 꿈을 꾸는듯한 광경이 로쿠로의 눈 앞에 펼쳐졌다.


터져나올듯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들어간 부모의 침소에서, 로쿠로는 아버지 우스이 와타리(臼井亘理)의 목 없는 시신과, 갈기갈기 베어진 어머니 우스이 키요코(臼井清子)의 시신을 발견했다. 11살 소년의 눈이 담아내기엔 지나치게 참혹한 장면이었다. 여동생 츠유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지만 상처를 입었다. 세 살배기였다.


2. 살인범이 충신으로 칭송받던 '근대화' 시대


1868년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있었던 해다. 대대로 일본을 지배한 무인 정권 에도 막부가 망하고, 유신 인사들이 구성한 근대적 신정부가 들어서던 격동기였다. 로쿠로의 부친 와타리는 막부 측 무사였고, 그를 죽인 이들은 유신 측 조직인 '간성대' 무사들이었다. 이들이 메이지 정부의 수립을 기화로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와타리 내외를 참살한 것이다.


로쿠로의 친지들은 살인범들을 붙잡아 처벌을 내려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당시 이들이 속해있던 아키츠키 번과 그 상위 번인 후쿠오카 번은 모두 간성대원들을 무죄로 판결하고, 오히려 우스이 가문에 죄를 물었다. 번청은 "와타리 본인이 평소 재물을 자랑하고 나라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재앙을 불러들인 것"이라고 했다. 자업자득이라는 뜻이었다. 반면 간성대원들의 살인 행각은 "충성스런 무사들이 나라를 위해 행한 의거"라고 했다. 막부를 타도한다는 명분 아래 엄연한 살인조차 구국적인(유신적인) 행위로 포장된 것이다.  

귀멸의 칼날 中  상처 입은 여동생 네즈코를 살리기 위해 떠나는 탄지로/고토게 코요하루·슈에이샤·애니플렉스·Ufotable


우스이 가문은 봉록이 깎였고, 법의 심판을 호소했던 친지나 지인들은 투옥됐다. 후일 문명 개화를 부르짖을 유신 정부 수립 첫 해에 벌어진 야만적인 비극이었다.


3. 로쿠로, 무사 수행을 떠나다


사건 이후 로쿠로는 번교(번의 학교)에 돌던 풍문과 제보를 통해 부모를 죽인 범인이 간성대원 이치노세 나오히사(一瀬直久)와 하기야 시즈오(萩谷静夫)임을 알게 됐다. "원수를 갚겠다"며 나선 로쿠로를 친지들은 말렸다. 어린 로쿠로가 복수를 하기에 적들은 검술이 뛰어났고, 유신 인사들이 살인도 의거로 둔갑시키는 세상인만큼 섣부른 행동이 오히려 화를 부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4년 뒤 원수 나오히사는 승진을 거듭해 도쿄로 상경했고, 이듬해 1873년 메이지 정부는 복수를 법으로 금지했다. 끔찍했던 사건 역시 흐르는 세월 속에 점차 잊혀져갔다. 마치 온 세상이 모두 로쿠로에게 복수를 그만두라고, 이젠 잊으라고 혀를 끌끌차는 듯했다.


19세가 되던 해, 로쿠로는 "도쿄의 상급학교에 가고 싶다"며 집안 어른들을 설득했다. "이젠 저 아이도 다 잊고 살려는구나" 친지들이 그렇게 여기며 전송할 때, 로쿠로는 단검 한 자루를 봇짐에 챙겨넣었다. 부친 와타리가 남긴 유품이었다. 아버지의 칼로 원수의 숨통을 끊겠다 - 로쿠로의 일념은 8년전부터 하나 뿐이었다.

탄지로의 검술 스승 우로코다키 사콘지(左), 로쿠로의 검술 스승 야마오카 텟슈(右)

도쿄에 도착한 로쿠로는 원수 나오히사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나오히사는 판사가 되어 있었고 섣불리 건들 수 없었다. 적의 동태를 살피며 틈을 노리기로 결정한 로쿠로는 당시 일본 최강의 검객으로 평가받던 야마오카 텟슈(山岡鉄舟)의 춘풍관 도장을 찾았다.


이곳에서 그는 정원 청소 등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검술을 배웠다. 성실한 로쿠로를 텟슈의 부인 에이코는 자식처럼 예뻐했고, 스승 텟슈 역시 아낌없이 가르침을 베풀었다. 로쿠로가 그처럼 선한 표정 속에 복수의 칼을 벼르고 있었음을 당시의 이들은 알 수 없었다.


로쿠로가 도쿄로 올라온지 4년째 되던 해, 그동안 나오히사는 영전을 거듭해 도쿄 고등재판소 판사가 됐다. 텟슈의 도장을 나온 로쿠로는 나오히사의 행적을 되짚던 중, 그가 두 사람의 고향인 옛 아키츠키 번의 번주(番主) 구로다 자작의 저택에 종종 놀러간다는 정보를 얻었다. 때마침 이곳에 친척이 거주하고 있었던 점은 로쿠로에게 있어 천운이었다.


4. 12년을 기다린 복수


1880년 12월 17일, 나오히사는 아타미 온천에 들르기 전 인사차 구로다의 집을 방문했다. 저택 2층에서 구로다와 환담을 나누던 나오히사는 잊고 있던 편지를 부치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다. 하인을 불러 편지를 맡긴 나오히사가 뒤돌아선 곳에, 처음보는 청년이 서 있었다.


"아버지의 원수, 각오해라"


찰나의 순간, 청년 우스이 로쿠로는 4년간 품에 간직해온 부친의 단도를 꺼내 나오히사를 공격했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나오히사와 로쿠로 사이에 일대 격투가 벌어졌지만, 끝내 로쿠로는 나오히사에게 단도를 박아넣었다. 로쿠로의 나이 23살, 부모에게 벌어진 참극 이후 12년만에 자식이 복수를 이룬 것이다.


귀멸 키부츠지 무잔(左), 영화 '遺恨あり' 이치노세 나오히사(右)


나오히사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로쿠로는 인력거를 호출한 뒤 피칠갑한 몸을 그대로 싣고 인근 경찰서에 자수했다. 로쿠로의 복수극은 언론과 소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11살에 부모를 잃은 로쿠로의 사연을 접한 시민들은 "로쿠로를 사면하라" "로쿠로는 무죄"라며 앞다투어 선처를 탄원했다. 혹자는 "부모의 원수를 잊지 않고 갚은 로쿠로야말로 진정한 무사"라며 추켜세우기도 했다.


로쿠로의 고향에서는 "드디어 로쿠로가 원수를 갚았다"면서 우스이 가문은 물론, 그들에게 동정적이던 지인들 모두 기뻐했다. 사건에 가담한 간성대원들에 대한 평판은 바닥을 기게 됐다. 로쿠로의 모친을 살해한 하기야 시즈오는 소식을 듣고선 "로쿠로가 온다, 로쿠로가 온다"면서 떨다 죽었다고 한다.


복수가 미덕이던 시대는 이미 사라졌고 로쿠로의 살인 또한 살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법의 테두리 내에서 해결할 수 없는 말로 못할 인간사의 실타래를 끊어낸 로쿠로에게 시민들은 대리만족을 느꼈고, 온정적인 시선을 보낸 것이다.


5. 복수, 그 후


복수 1년 뒤, 재판에서 로쿠로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도쿄 집치감에 수감됐다. 스승의 부인 에이코가 종종 의복과 음식을 넣어주며 그를 돌봤다. 이곳에서 로쿠로는 모범수로 복역했고, 이후 감형되어 수감 8년만인 34살에 출소했다. 로쿠로의 복역 중에 스승 야마오카 텟슈는 사망했지만, 에이코가 지인들을 초청해 로쿠로의 출소를 위로하는 연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에이코와 로쿠로의 심성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귀멸 카마도 탄지로(左), 우스이 로쿠로(右)


출소 후 로쿠로의 생활은 여동생 츠유 내외가 도왔다. 오빠와 함께 참극을 겪었지만 츠유는 건강하게 자랐고, 자신을 좋아해주는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츠유의 남편은 로쿠로의 장사 공간을 마련해줬고, 이곳에서 로쿠로는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이후로도 평범한 삶을 이어가다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6. 끝내며


어린 나이에 불의의 습격으로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스승을 찾아 검술을 배운 뒤 끝내 복수에 성공하고 평온한 삶을 이어간 우스이 로쿠로. 세세한 점은 다를지라도, 귀멸의 칼날 주역 탄지로의 삶은 큰 틀에서 우스이 로쿠로의 삶과 닿아 있다.


구태훈 교수가 쓴 '복수와 일본인'에 따르면 전근대 일본인은 원수의 목숨을 빼앗는 '가타키우치(敵討)' 관습을 이어왔고, 이 가타키우치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은 비단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한다. 나의 소중한 사람을 빼앗은 이들에 대한 복수는 결국 효도, 충성, 보은의 가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성으로는 당연히 모두가 '살인은 살인일 뿐'이며, 법치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범죄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성만으로 이해해줄 수 없는 극악무도한 중범죄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대상이 내 가족이 됐을 때 온전히 이성적인 판단을 추구하는 것은 물론 인간으로서 지향해야할 미덕이지만, 그게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우스이 로쿠로 사건을 극화한 영화 '遺恨あり'(2011)/아사히tv 홈페이지


귀멸의 칼날이 결국은 복수극임에도 인기를 끌었던 이유, 우스이 로쿠로가 중범죄자임에도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범죄 이후에도 그를 온정적으로 대했던 이유는 그 결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무고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평범하게 살아왔던 이들에게 이유 없는 비극이 닥쳤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싸워나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인기 있을 것이다. 그 형태가 복수가 아니고 참극이 아닐지언정, 이유 없는 비극과 그에 대한 저항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이므로.


참고한 글들

*구태훈 저, 복수와 일본인/히스토리메이커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우스이 로쿠로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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