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김혜진 장편 ‘경청’
신작 장편 '경청' 펴낸 소설가 김혜진
무책임하게 던지는 말 한마디의 해독
빠르게 판단하고 쉽게 망각하는 세태
"한국사회, 더 기다려주는 자세 필요"
-이성목 기자에게. 안녕하세요. 임해수입니다.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상담사 발언, 이대로 문제 없나' 지금도 저는 기자님이 저에 대해 썼던 그 기사의 제목을 기억합니다. 어떤 기억들은 절대로 잊히지 않고, 결국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읽는 기사를 어떻게 그런 추측과 짐작으로 쓸 수 있는지. 당사자인 저에게 아무런 사실 확인도 없이 어떻게 그런 기사를 내보낼 수 있는지.
몇 개의 단어나 한 줄의 문장이 심장을 찌를 수 있다. 폐부를 찌르는 인생의 문장도 있겠지만, 인터넷 세상에서 접하는 짧은 글이나 쉽게 던지는 말들에는 누군가를 상하게 하는 것들이 많다. 빠르게 판단하고 서둘러 돌을 던지는 행태는 주변에 널려 있다. 이런 세계에서는 누구라도 언제든 그 돌을 피하기 쉽지 않다. 김혜진의 새 장편 '경청'(민음사)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인물의 내면을 따라가며 이런 현실을 차분히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심리 상담사 임해수는 말에 관해서라면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설명하고 반박하고 동의하고 고백하면서 보이지 않는 내면을 드러내는 도구로 말의 유용한 기능을 의심해본 적도 없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말로 인해 깊은 수렁에 빠졌다. 방송에 나가 주어진 대본대로 한 배우의 품성과 행실에 대해 비판적인 말들을 했는데, 그 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많은 이들이 그녀를 비난했고, 오래 근무했던 상담센터에서도 해고됐다. 한 번도 부재의 미래를 의심해본 적 없는 남편 태주도 그녀 곁을 떠나간다.
그녀는 낮 시간은 어찌어찌 견디다가 저녁 무렵이면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밤이 오면 산책길에 나서서 공원을 돌다가 공들여 쓴 편지를 폐기한 뒤 하루 일과를 마친다. 날이 밝으면 다시 힘든 시간을 견디다가 보낼 기약이 없는 편지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그녀 말고도 그 배우를 비난한 사람들은 많은데 그녀를 마녀로 몰아간 기사를 맨 처음 쓴 기자에게, 사태가 전개되자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평소 태도를 비난한 후배 상담원에게, 그 상담원의 말을 조종한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센터 대표에게, 유가족을 먼저 만나보라고 종용했던 절친 주현에게 그녀는 편지를 쓰고 또 쓴다. 억울함과 자기 연민이 담긴 편지들이다.
-그날 내가 방송에서 한 말들이 이리저리 퍼지기 시작 했어. 이름도, 얼굴도 다 알려진 유명한 배우에 대해 한마디 한 걸 가지고 유난이구나 싶더라. 당시 그 배우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니었잖아.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내 합성 사진 본 적 있니. 변기에 앉아 만세 자세로 입을 벌리고 있는 사진. 내 머리 위엔 '제발 관심을 주세요, 여러분!'이라는 말풍선이 떠 있고, 말풍선이 움직일 때마다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지. …보고 있으면 말문이 막히고 헛웃음이 나다가 결국엔 모든 게 끝장이 났다는 생각이 든다.
가깝다고 생각한 이웃들이 던지는 말에는 더 큰 상처를 받는다. 그녀와 겨우 소통하는 존재는 병든 길고양이 '순무'와 이 동물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만난 열 살짜리 아이 '황세이'다. 순무는 쉽사리 통덫에 들어가지 않고, 억지로 넣으려다 상처를 입기도 했다. 아이가 나서서 순무를 어렵사리 덫에 넣어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 치유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아이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지만 무심하게 순무를 접점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순무는 사람의 말을 모르니 침묵을 지키지만 고통을 호소하는 표정과 눈짓에 그녀의 감정이 이입된다. 말에 관한 한 자신이 넘쳤고 말의 유용한 기능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그녀는 '자신은 그저 넘쳐 나는 말들에 둘러싸여, 불필요한 말들을 함부로 낭비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문학이라는 게 언어로 짓는 집 같은 거니까 말에 대해서 늘 생각을 하는데, 제가 정말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 것에는 늘 도달하지 않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저에게 어떤 중요한 말을 할 때에도 그 말이 그 사람이 의도한대로 정확하게 도달하지 않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평소에 그런 고민을 하는 편입니다."
김혜진은 "듣는 행위라는 건 타인의 얘기를 듣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를 듣는 두 가지 일"이라며 "듣는 일은 되게 어려운 것 같다"고 말한다. 이번 소설이 제기하는 첨예한 이슈는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악성 댓글이나 부실한 짜깁기 기사, 혹은 가짜 뉴스의 한줄 한 문장이 얼마나 한 사람에 상처를 줄 수 있는지의 문제이지만, 소설 속에서 작가는 시종 이른바 가해자나 피해자, 어느 편도 쉽사리 들지 않는다.
"사실 저 자신을 돌이켜보면 저도 그 문제에 대해서 혐의가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거든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어떤 사람에 대해서 빠르게 좀 판단을 한다거나 잘못했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경험들이 있어요. 거기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잘 모르겠는데 조금 더 기다려주는 거, 혹은 판단을 조금 유보하는 거, 당장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혜진은 "우리 사회는 조금 더 기다려주는 자세가 필요하다"면서 "빠르게 판단하기보다는 조금 더 기다려준다면 그런 일들이 덜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소설 속 임해수는 함께 고양이를 돌보는 '마루맘'이 주민과 갈등을 빚는 국면에서 어느 한 쪽 편에 서는 것을 유보하면서 되뇌인다.
-그녀는 선을 긋고 편을 가르고 어느 한쪽에 서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분명하게 입장을 정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어떤 면에선 쉽고 수월하다. 그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는 신속한 방식이고 그러므로 매혹적이다. 자신과 무관하기만 하다면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그보다 더 빠르게 그 판단을 철회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망각 속으로 던져 버리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한 대가로 자신의 삶이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세이'는 또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운동회에서 폭발하고 만다. 맞은 아이의 학부모들은 세이를 학폭으로 몰아가고, 임해수는 우연히 그 현장을 목도했다가 세이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녀는 세이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냉정하게 우선 세이가 먼저 사과하는 게 맞다고 잘라 말한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녀는 목숨을 끊은 배우 박정기의 아내를 만났을 때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모두 자기 변명에 불과'하고 '그녀가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침묵보다 하찮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는다. 그녀가 수많은 편지를 쓰고 또 버리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면서 도달한 깨달음이다.
김혜진은 '그녀는 승리하지도 패배하지도 않았'으며 '시간이 환호와 야유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다만 그렇게 한 시절을 지 나왔을 뿐'이라고 썼다. 승리하지도 패배하지도 않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냥 사는 일 아닐까요. 임해수는 물론 세이라는 꼬마와 고양이 순무도 각자 나름의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데 모두 그 곤경을 드라마틱하게 극복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서로 그냥 좀 의지해서 그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 거의 이제 빠져나가고 있다는 정도로 생각을 한 거죠. 어떤 순간에는 내가 이겼다, 혹은 패배했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좀 길게 지나고 나서 보면 그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거든요."
2012년 신춘문예(동아일보)로 문단에 나와 이듬해에는 다시 중앙장편문학상에 '중앙역'이 뽑혀 본격적인 작가의 행보를 이어왔다. 소설집 '어비' '너라는 생활', 장편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중편 '불과 나의 자서전'에 이어 이번에 다시 장편 '경청'을 펴냈다. '딸에 대하여'는 해외에서도 각광을 받아 프랑스 명문 출판사 갈리마르에서도 지난 4월 출간됐다.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섣부르게 동정하거나 연민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가슴으로 담아내는 김혜진은 "그냥 항상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며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주는 영감이 크기 때문에 항상 서 있는 자리에 대해 쓰려고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소설 말미에 이르러 임해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그들의 모습을 기술하는 김혜진의 마음에도 환한 불이 켜진 듯하다.
-그녀는 아이의 마음속에 불이 켜진 것 같다고 느낀다. 두 사람 모두 불이 켜진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느낀다
*이 글은 UPI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upinews.kr/newsView/upi202211170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