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력이 경계인 이유
물고기를 키우며, 나는 수없이 많은 탄생과 죽음을 지켜보았다. 새롭게 시작되는 작은 생명들을 볼 때마다 생명이란 얼마나 신비로운가, 감탄했고 조용히 죽어가는 물고기를 바라보며 죽음이란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프고 또 생각보다 더 자주, 가까이 있는 일이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자연스레 생각했다.
‘누구나 물고기를 키우다 보면, 나처럼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나보다 더 많은 물고기를, 더 오랜 세월 키워온 이들이 “물고기를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라고, 또 충격을 받았다.
같은 경험을 하고도 전혀 다르게 느끼는 사람들, 같은 길을 걷고도 서로 다른 문을 여는 사람들. 그건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수행을 하며 신비한 체험들을 겪었다. 마음이 고요해질수록 알 수 없는 직관이 생기고 누군가의 생각이 흘러들듯 느껴지기도 했다. 기도를 하다 보면 빛이 보이기도 했고, 전생의 장면처럼 스쳐가는 이미지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물론, 그런 체험들은 기쁘기보다는 두려웠다. 대부분 안 좋은 미래를 보여주거나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들과의 전생을 비추었기에. 그리고 끊임없이, 신은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그러나 그런 경험으로 인해 나는 또다시 생각했다.
‘누구든 꾸준히 기도하고 수행하면, 나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되겠지.’
그런데 그것도, 나만의 착각이었다.
오랜 세월 수행했음에도 아무런 체험을 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고, 오히려 내 체험을 낯설게 여기거나, 때로는 이상한 이야기라며 멀리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불교서적을 들고 불교학 박사님께 따지듯 물은 적이 있다.
“책에 이렇게 쓰여 있잖아요. 이런 경험들이 있고, 이런 단계를 거친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책을 쓰신 분이 이런 체험에 대해 확신이 없을 수 있죠?”
그때는 아직 몰랐다. 같은 물을 마셔도 독사는 독을 만들고, 소는 우유를 만든다.
수행을 해서 신통이 생긴 사람이 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독사라는 뜻이 아니다. 단지, 같은 수행을 해도 누군가는 신통을 체험하고 누군가는 아무런 체험 없이 지나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 따르면, 영감이 발달한 사람은 전체 인류 중 극히 일부라고 한다. 이러다 보니 어떤 이들은 신통력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차이는 왜 생기는 걸까?
신통력의 문이 열리는 조건
불교에서는 신통력을 단순한 기적이나 마법으로 보지 않는다. 신통은 깊은 수행이 낳은 부산물이며, 잠시 열린 마음의 틈 사이로 비쳐드는 또 다른 감각이다.
불교에서는 여섯 가지 신통력을 이야기한다.
멀리 있는 것을 꿰뚫어 보는 천안통,
남의 마음을 읽는 타심통,
전생을 기억하는 숙명통,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는 천이통,
공중을 날거나 벽을 통과하는 신족통,
번뇌를 완전히 끊은 경지인 누진통까지.
그런데 왜 어떤 이에게는 신통력의 문이 열리고 어떤 이는 아무리 기도해도 신통의 존재조차 느낄 수 없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업(業)의 차이
영혼은 지금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아주 긴 여정을 지나왔다. 어떤 이는 그 여정 속에서 전생부터 수행자의 길을 수없이 걸어왔고, 그 깊이 있는 흐름이 이번 생에서도 바탕이 된다. 반면, 어떤 이는 이제 막 수행의 첫걸음을 뗐으며, 마음속엔 아직 풀어야 할 상처와 집착이 가득하다.
그 안개를 걷어내는 데는 더 오랜 시간과 연습이 필요하다.
2. 마음의 동기
‘신통력을 얻고 싶다’는 욕망으로 시작된 수행은 그 욕망 자체가 수행의 문을 닫아버린다. 반면, 순수한 마음은 언제인지도 모를 때, 조용히 신통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신통은 쫓을수록 멀어지고, 버릴수록 다가오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3. 마음의 정화 정도
흐린 연못에는 달빛이 비치지 않는다. 분노와 욕망, 상처들이 가라앉고 마음이 맑아질 때, 그 고요한 물 위에 비로소 신통이라는 감각이 떠오른다. 신통은 ‘얻는 것’이 아니라, 맑아진 마음에 ‘비추어지는 것’이다.
4. 삼매의 깊이 — 집중의 힘
수행의 깊이가 다르기에 열리는 문도 다르다. 마음이 한곳으로 또렷이 모일 때, 어떤 벽이 스르르 무너지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난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부처님과 많은 선지식들은 신통을 수행의 부산물이라 인정하면서도, ‘경계’의 일종이라며 주의를 당부하셨다.
경계란, 수행자가 수행 중에 의식 안팎으로 마주치는 모든 현상과 체험을 의미한다.
단순한 외부 자극만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정신적 현상까지 포함한다.
▫ 경계의 두 가지
1. 외경(外境)
외부에서 오는 자극들 — 소리, 냄새, 날씨, 타인의 말, 상황 등.
2. 내경(內境)
수행 중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체험 — 잡념, 감정, 환상, 환청, 전생처럼 느껴지는 이미지, 신통력 같은 초월적 경험들.
경계는 수행이 깊어질수록 더 미묘해지고 때로는 ‘깨달음’처럼 보이기도 하기에, 수행자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무엇보다 경계를 ‘법’으로 보지 않고, 현상 자체에 끌려가게 되면 마음은 곧 마구니의 유희에 끌려들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구니’는 귀신 같은 존재만을 뜻하지 않는다. 수행자의 마음을 흐리는 집착, 오만, 두려움, 혼란, 자만심, 허망함 등 모든 장애 요소를 포함한다.
경계를 대하는 태도
•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 집착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 모든 경계는 무상하다. 지나갈 것이다.
• 수행자는 경계 너머의 진실, 마음의 실상을 꿰뚫어야 한다.
한때 나는 큰스님들께 물었다.
“제가 겪는 이 일들… 혹시 제가 미쳐서 그런 걸까요?”
스님들은 잠시도 머뭇임 없이 말씀하셨다.
“아니다.”
그러면서도 덧붙이셨다.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도로 옆 가로수에 빠지지 말아야 하네. 신비한 체험이 아무리 특별하게 느껴져도, 그건 그냥 도로 옆에 있는 가로수 같은 거야. 멈추지 말고, 그냥 스쳐 지나가게 두게.”
나는 지금껏 많은 경계를 지나왔고, 여전히 새로운 경계 앞에 서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는 시간 속에서 내가 겪은 경계들을 조금 더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고 있다. 그건 나에게 조용한 평안이 되어 준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경계를 마주하고 있다면, 부디 무사히, 조용히, 그 경계를 건너시길.
다음 장에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믿기 힘든 내가 지나온 경계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것들이 당신의 마음에 작은 등불 하나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