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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Dec 17. 2023

진정한 사랑

말을 품다

  세상에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멘털 면역력이 바닥을 친 2년 전, 한 다큐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꾸밈없는 모습으로 소신 있게 풀어가는 그녀의 삶은 담백하고 풀 향기 나는 노년의 모습이었다. 강한 인상이 남아 몇 번이고 반복하며 헝클어진 내 마음을 다독였다.  그녀의 나이 72세. 서울대학교 독문학 교수였으며 지금은 괴테 마을을 짓고 있는 할머니다.


 코로나 블루를 지독히 앓은 아이 곁에서 보낸 내 삶은 한동안 엉망이었다. 불안함이 극도로 달했던 아이의 상태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답답함에 해서는 안될 말도 서슴없이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와중에 시어머니의 이유 모를 병환으로 집에서 간호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 내 일은 뒷전이었다.


아이와 산책을 하기로 했다. 청아하게 흐르는 물소리와 부드럽게 내리쬐는 햇빛은 우리를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밤새 뒤척이다 잠이 오질 않아 따뜻한 차를 마셨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밖은 소복하게 쌓인 눈 때문에 훤했고, TV를 켜자 초록색으로 물든 넓은 정원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는 7인분 노비예요. 개 집만 한 집이면 족합니다.”


이 사람 정체는 뭐지?

희끗희끗한 머리, 투박한 말투로 조심성 있게 말을 건넨 그녀는 한때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었다. 현재는 정년퇴임 후 번역을 하며, 모두를 위한 공간에 정성을 쏟고 있었다.


“꿈을 가지라는 추상적인 말 대신, 뜻을 가지면 사람이 어떤 높이와 넓이에 이를 수 있는지, 또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키웠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물을 젊은이들을 위해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 인물로 그녀는 괴테를 선택했고, 작은 마을을 만들어 서원 한쪽에 공사를 하고 있었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그 공간은 모든 일반인에게 열린다. 나는 함께 하고 싶은 대상으로 아이를 택했다. 방문객이 많을 것 같아 새벽 일찍 출발했다,

도착시간 8시 30분!


주차장에 차량은 2대밖에 없었고,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없어 의아했지만, 선물 받은 포장지를 뜯는 것 마냥 설렘 가득 안고 서둘러 걸어갔다.

 마침 서원의 문은 열려 있었고, 깨끗하고 정갈하게 가꿔 놓은 정원과 풀이 눈을 시원하게 해 줬다. 3200평 정도 되는 넓은 공간을 그 작은 체구로 혼자 감당할 수 없을 텐데, 분명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서원 안에 낮은 산이 있었다. 그녀가 공들인 괴테 길에는 군데군데 괴테가 쓴 짧은 문구가 있었다. 한 구절, 한 구절, 마음이 울렁거렸다.


아이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괴테의 길을 따라 땀이 날 만큼 걸었을 때 높은 곳에 전망대가 있었고,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지은 그곳은 가팔라서 다소 올라가기 곤혹스러웠다.  이마에 살짝 난 땀을 닦으며 아이가 햇살을 뒤로한 채 싱긋 웃었다. 여유롭게 음료수와 빵을 먹고 내려오는 길, 그때까지도 인기척은 없었다. 한 바퀴 돌아 교수님 계신 곳을 지나칠 무렵, 커튼 뒤로 교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해맑게 웃어주는 그녀가 문을 열며


“저희는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한 달에 한번, 여러분에게 열립니다.”


순간! 아차 싶어 핸드폰 달력을 보았다. 그 달의 첫 번째 토요일이었다.

나의 착오로 방문한 발걸음이 무안해질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잠깐 들어오라는 그녀의 말에 아이와 나는 실례를 무릎 쓰고 들어갔다. 아이에게 뭔가 도움 될 만한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는지 그녀는 보자기로 싼 한지 종이를 쭉 펼쳤다.  길이가 무려 10m는 훌쩍 넘을 정도였다.

“학교 문턱에도 들어가 보지 못한 어머니가 책만 보면 한지에 필사를 해 낱장이 흩어지도록 다 외우셨지요. 그때 당시에는 책이 참 귀한 거였어요. 참 고생스럽게 사셨는데, 친정에 가고 싶어도 책을 읽고 감내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책이 참 큰 위로가 되었죠.”


이번엔 사전만큼 두꺼운 책을 보여주며


“저희 아버지가 쓰신 것입니다. 괴테의 글은 술술 읽는데, 증조부의 문집을 못 읽는 저를 보고 아버지께서 옥편을 찾아가며 일일이 한글로 번역해 주셨죠. 평소 등산을 즐겨하셨는데 45킬로의 조그만 체구로 본인보다 큰 배낭을 지고 매년 에베레스트를 오르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존경심이 묻어나는 대화였다.

 

아이는 연신 공손히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넋 놓고 듣고 있다가 더 이상은 민폐가 될 것 같아 얼른 나왔다.


날짜 착오에 대해 아이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내게는 의미 있는 날이었음에 감사한 하루였다. 나오는 길 어린이 도서관이 있어 잠깐 들렀다. 아이가 방명록을 들춰보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정자로 글을 쓰고 있었다. 어미의 잘못을 아이가 대신해 사과문을 쓰고 있었다.


하.. 나 요즘 왜 이렇게 정신이 없을까?


 누군가가 내게 원하는 시간으로 데려다준다고 제안을 한다면, 난 그 기회를 거절할 것 같다. 그래도 아직 견딜만하니까. 막상 돌아가면 그때 느꼈던 어려움이 반복될 것만 같다.


 무슨 말이라도 품어 주는 사람이 필요했었다. 무기력했던 내게 일어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준 지인들께 감사한 말씀을 전하고 싶다. 이제는 그동안 내가 받은 사랑만큼 삶에 지쳐 한마디 두 마디 내뱉는 사람들의 말을 품어 주는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Lieben belebt – 사랑이 살린다>

-바르게 행하려는 자 가슴에 진정한 사랑을 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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