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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프피 Jun 18. 2024

고독의 연옥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책(15)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내 방의 암막커튼은 좀처럼 걷어지지 않는다.

불을 끈 저녁이면 내 방은 온전한 암흑이다. 창 밖 고가도로를 달리는 바퀴 소리, 윗집의 수돗물 소리, 옆집의 아기 울음소리는 정적을 더욱 정적이게 하는 장치다.

내 방은 고독의 연옥, 허술한 고립. 나는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이 시집은 내 방을 닮았다.

​​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단어들을 한 데에 몰아넣고, 섞이든지 말든지 마구 휘젓곤 잡숴보라며 내놓는 시들이 많다.

물론, 그것들이 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내놓는 이들이 시인이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시가 무엇인지 정답을 말할 수 없고, 시인이 무엇을 가지고 시를 써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엉킨 스탭 그대로 춤이 되는 탱고처럼

엉킨 단어 그대로의 시가 있는 거겠지.​

소화가 잘 되는 시가 있고, 그렇지 않은 시가 있는 거다. 뭐든 잘 소화하는 독자가 있고, 도무지가 예민해서 편식이 심한 독자가 있는 거고.

이 시들은 내 위장에 알맞는다.

이 시들은 내 위장에서 소화되기에 수분기가 적당하고 자극의 정도도 적절하다.




자기 고독이 어떤 모습인지 잘 들여다보려는 시인이 많아졌음 좋겠다. 그렇게 관찰한 것들을 시로 쓰는 시인들이 많아졌음 좋겠다.

고독을 아는 시인들이, 아니, 고독을 아는 사람들이 시를 쓰려는 시도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

​​





천국이 아니어서 불온하고 검은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서 불온하고 검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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