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책(15)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내 방의 암막커튼은 좀처럼 걷어지지 않는다.
불을 끈 저녁이면 내 방은 온전한 암흑이다. 창 밖 고가도로를 달리는 바퀴 소리, 윗집의 수돗물 소리, 옆집의 아기 울음소리는 정적을 더욱 정적이게 하는 장치다.
내 방은 고독의 연옥, 허술한 고립. 나는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이 시집은 내 방을 닮았다.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단어들을 한 데에 몰아넣고, 섞이든지 말든지 마구 휘젓곤 잡숴보라며 내놓는 시들이 많다.
물론, 그것들이 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내놓는 이들이 시인이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시가 무엇인지 정답을 말할 수 없고, 시인이 무엇을 가지고 시를 써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엉킨 스탭 그대로 춤이 되는 탱고처럼
엉킨 단어 그대로의 시가 있는 거겠지.
소화가 잘 되는 시가 있고, 그렇지 않은 시가 있는 거다. 뭐든 잘 소화하는 독자가 있고, 도무지가 예민해서 편식이 심한 독자가 있는 거고.
이 시들은 내 위장에 알맞는다.
이 시들은 내 위장에서 소화되기에 수분기가 적당하고 자극의 정도도 적절하다.
자기 고독이 어떤 모습인지 잘 들여다보려는 시인이 많아졌음 좋겠다. 그렇게 관찰한 것들을 시로 쓰는 시인들이 많아졌음 좋겠다.
고독을 아는 시인들이, 아니, 고독을 아는 사람들이 시를 쓰려는 시도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
천국이 아니어서 불온하고 검은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서 불온하고 검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