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이름 모를 누군가와 소통하기도 하고, 예술이 발전하고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가상의 존재들에게 공감하기까지 이르는 날들을 살고 있다.
이렇게 외부적인 요인이 감정 또는 내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늘어나는 만큼, 내가 존재하는 시공간에서의 감정 소모를 적당히 분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와 어떠한 형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면, 나는 당연하게도 빈틈없이 자극을 받는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날들에 정신없었던 어린 시절, 나는 이제야 조금 힘을 빼고 내가 안전할 수 있는 관계에 더욱 감사하며 편안해지고 싶어졌다.
내게 초등학생 때 사회성을 기른다는 것은, 아침엔 가족과 이웃에게 예의 바르게 하며 학교에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선생님에게 새로운 지식을 배우기 위한 흥미를 유지한다. 학교를 마치면 문방구 아저씨, 분식집 아주머니와 담소를 나누며 '저 이쯤이면 단골이지 않나요.' 하며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정과 친절을 얻어가고, 그것을 몸으로 배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실내 생활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방과 후부터는 가정 방문 선생님이나, 엄마, 그리고 티비속 애니메이션과 하루를 마무리했다.
현재는 사회성을 기르기 위한 배움이 훨씬 늘어났다.
대표적으로 예를 들자면, 지금은 키패드와 키보드로 전달하는 텍스트로 비롯한 사회성이다.
초등학생 때 나는 친구들과 오해가 생기면 집에 한 뭉치씩 있던 편지지에 손글씨로 적어 내 맘과 화해 의지를 드러내고는 했다. 손글씨를 읽어 내려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표정과 제스처와 목소리의 톤을 함께 듣는 것과 같은. 마치 음성지원이 되는 느낌이었다.
카카오톡이라는 것이 생겼던 사춘기 시절,
1이라는 관심의 리턴값을 두고 우리가 얼마나 초조하고, 뻘쭘하고, 억울했는지...
당시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는 좋아요, 리트윗 등의 유무를 체크하기에 바빴다. '다음에 밥 한번 먹자'라는 식의 상대와의 관계를 유지할 의지가 있음을 드러내는 인사말의 경우의 수가 늘어나며 선뜻 먼저 약속을 권하기에 한층 더 복잡해졌다.
특히나 내가 살아온 어린 시절부터 지금의 시대는 인터넷 시대가 한창 열릴까 말까 했던 시점부터 인터넷이 세상을 정복해 버린 때까지 불과 10년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한창 자아성찰과 자기 객관화가 이루어져야 할 시점에 나에 대한 정체성을 네트워크 통신망의 공간 안에서 찾아가고 있었다.
아마 지금의 학생들 또한 그렇겠지...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많이 지쳐버린 것 같다.
이제는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모두 이용하고 있지 않고 용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선뜻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나서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이게 네트워크 통신망의 폐해라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난 아날로그 소통과 대면을 주로 하는 관계가 좋을 뿐이다.
그래도 항상 결론은 어느 시점에 살았던, 내 인격과 정체성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거다.
이걸 깨달았을 지금쯤 돌고 돌아 나는 겨우 담담해질 수 있었지.
붙임성이 너무 좋았던 나는 이제 '적당함'을 찾아 상대방을 배려할 줄도 알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