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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호 Aug 19. 2021

온전한 이별을 위한 만남

일병으로부터 일병에게

  현충원의 아침은 항상 평화롭고 아름답다. 생활관 창문으로 보이는 모역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묘비들이 오와 열을 맞추고 있다. 가끔 너무도 많은 묘비들을 바라보며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히 느끼곤 한다, 하지만 전쟁이 70년도 지난 지금,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호국용사님들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의 수를 하나라도 더 늘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6․25전쟁 발발 70주년의 해이자 휴전 협정이 맺어진 날짜 7월27일에 나는 입대를 했다.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유해관리병이 되어 있었다. 유해관리병의 주요 업무는 유해 반입과 반출을 관리하고 신원이 확인된 호국용사님을 화장하여 유가족분께 돌려드리는 일이다. 호국용사님이 신원 확인될 때마다 나는 유해관리 담당관님과 함께 화장장으로 출장을 떠난다. 어떤 경우에는 유가족분의 선택에 따라 유해는 고향에 소재 되어 있는 화장장으로 가야 하므로 나는 다양한 지역의 화장장을 방문한다. 그리고 화장장에서 호국영웅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다.

  감식병으로서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찾고 그들이 가족과 국가의 품으로 돌아가 못다한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숭고한 일의 일부가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처음 감식병이 되었을 때부터 이 정도의 마음가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명감은 한 일병을 만나면서부터 뜨겁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몇 주 전에는 여느 때와 같이 중앙감식소에서 신원 확인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착한 유해보관실에는 차가운 공기가 나의 얼굴과 목을 감쌌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를 꺼내 오동나무 관에 넣고 바코드를 붙였다. 그리고 담당관님이 수없이 강조했던 것에 따라 태극기를 꼼꼼하게 다렸다. 처음 내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새로운 일들이 밀려오는 생경함과 잘 해내야 한다는 긴장감에 유해를 보았을 때도, 화장장에 도착했을 때도 감정적인 동요가 크게 없었다. 그러나 별다를 것 없이 일을 시작한 그 맑고 선선한 가을날은 무언가 새삼스러웠다. 명패를 인쇄할 때 다시 한번 신원을 확인해 보니 호국영웅님의 계급이 나와 같은 ‘일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넘겼을 사소한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만큼은 ‘일병’이라는 두 글자에 동갑내기 친구를 만난 듯하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일병 이민호’라고 외치는 일은 나에게 매우 쉬운 일이다. ‘일병’이라는 말은 ‘3학년 3반 이민호’나 ‘인류학과 이민호’처럼 그저 나의 소속이나 신분을 밝히는 수식어에 불과했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한없이 다정했을 얼굴이 사라지고 차가운 뼈만이 남은 당신 앞에서, 두 글자의 무게는 커다란 바위가 떨어진 것처럼 무지근했다. 당신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짊어진 무게는 감히 내가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나의 가벼운 안일함은 수십 년 전, 나와 같은 계급인 수많은 청년의 죽음 위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 순간 기계적이던 나의 다림질에는 숭고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명패와 수갑을 챙기고 담당관님과 함께 유해를 유해봉송 차량에 실었다. 개조되어 좁은 좌석 칸에 앉아 가는 것이 신기하게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우리가 코로나에 안 걸리는 건 호국영령님 덕분이야.” 누군가의 농담에 웃으면서도 나의 마음은 복잡했다. 나의 일병에게, 나는 명예로운 죽음에 마땅한 예우를 드리고 있는 것일까...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 운전병이 힘껏 끌고 가는 무거운 차 안에 앉아 나는 나의 업무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세 달만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화장장에서 호국영웅님의 유해를 화장하는 일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한 이들을 다시 조국의 품으로 모시기 위한 마지막 절차이다. 호국영웅의 신원을 확인하고 화장 절차에 들어가는 것은 국유단의 일원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기쁜 순간이다. 그러나 그날 눈물 흘리는 유가족을 보았을 때 나의 일에는 내가 가졌던 얄팍한 행복감을 넘어서 더 큰 대의가 있음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혼이 다다른 화장터는 하나같이 깨끗하고 평화롭다. 하지만, 유가족에게는 사랑했던 누군가를 진정으로 떠나보내는 마지막 순간이기도 하다. 잘 가라는 말조차 하지 못한 채, 사무친 그리움에 수십 년을 견뎌낸 이들은 화장터에서 재회하지만, 곧 화장으로 그리웠던 피붙이와 작별한다.

  유가족분은 유해의 신원이 확인되기 직전에 호국영웅님의 아내 분이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다. 아내 분은 평생 남편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을 강에 뿌려달라고 했고 이런 안타까운 사연으로 부부는 합장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그 강가 주변 흙으로라도 함께 묻어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죽음으로 가로막힌 만남을 이루어드릴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드리고 싶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가족과 만나고 장례를 치를 수 있는 망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권리를 지켜드리기 위해서라도 이 일에 온전한 마음으로 임해야 함을 깨달았고, 뼈아픈 그리움과 슬픔 앞에서 그것은 내가 감사함으로 작게나마 드릴 수 있는 선물이었다. 그날, 그 뼈저린 슬픔의 세월을 입증하듯 쨍쨍했던 하늘에서는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마지막으로 화장장 직원에게 태극기로 관포된 관을 전달하고 호국영령님에게 경례 인사를 드렸다. 화로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관을 보는 것으로 출장의 모든 업무가 끝난다. 천천히 닫히는 두꺼운 철문 곳곳에는 녹슨 자국이 남아 있었다. 까맣게 그을린 철문은 영령과 유가족들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마음에 걸렸지만 불만을 토로하는 나에게 담당관님은 유가족에게 저런 녹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70년 만에 잠시지만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제야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유가족들에게는 곱절로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같은 계급과 비슷한 나이. 전쟁의 혼란을 겪어낸 일병과 수십 년 후 그를 위해 태극기를 다리는 일병. 시대를 초월해 전해지는 충절에 나의 가벼움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군인으로서의 사명감이 나의 몸과 마음에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참여하고 있는 일들의 가치를 깨달았다. 나라를 위해 스스로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영웅을 한 분이라도 더 모실 수 있다면 더 많은 이에게 유해발굴 사업이 추구하는 숭고한 가치를 알리고 싶다. 그리고 호국용사님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가 하나라도 더 세워졌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죄송스럽다.

  누군가의 가족, 누군가의 친구였던 나는 입대를 위해 평범한 일상과 이별했고 ‘일병’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차가운 뼈가 되어 돌아온 수십 년 전의 또 다른 한 명의 ‘일병’은 뜨거운 애국심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청년의 삶을 잃을 것을 불사하고 명예롭게 희생되었다. 수많은 영웅적인 일병들을 위한 일을 하며 나와 같은 일병이 어찌 불평할 수 있겠는가. 유가족들은 단 한 번의 온전한 이별을 위한 만남을 거자필반의 마음으로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다. 그 한을 풀어줄 수 있는 자리에 있음에 감사했고 앞으로도 늘 감사할 것이다. 충절로 죽음을 택한 귀한 혼들을 위해 나의 미약한 충성이라도 바칠 것을 날마다 맹세하리라.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평온한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감사와 충성의 마지막 경례를 드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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