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 빵집, 유기농 쌀, 유기농 사과, 유기농 면, 유기농 매장…….
믿을 수 없는 먹거리가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 유기농이라는 단어는 왠지 포근한 어감으로 마음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준다. 어느 날 문득 그 뜻이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유기농의 유는 한자로 ‘있을 유(有)’ 자를 쓰더라. 그럼 그 반대말인 무(無)기농도 있을까? 말장난 같다고? 의외로 정말 있었다. 환경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는’ 농부님이 재배한 것이 유기농이고,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이 무기농이라고 한다. 하하, 농담이고요, 아쉽게도 유/무기농은 그렇게 감수성 풍부한 단어는 아니었다. 화학적인 관점에서 유기 비료를 주는지, 무기 비료를 주는 지로 구분한다고 한다.
유기농법에서는 농약을 쓰지는 않지만 대신 ‘천연 살충제’는 쓴다. 앞에 천연이라는 청량한 느낌의 수식어가 붙어 느낌이 다소 희석되긴 하지만, 그래도 죽일 살(殺) 자가 들어간 엄연한 살충제다. 생명체에게 무해하고 속단할 수는 없겠다. 만약 그렇다면 벌레가 죽는 대신 튼튼해질 테니 말이다. 가령 황산구리는 독성물질이지만, 자연에서 온 물질이기 때문에 유기농법의 살충제로 쓰일 수 있다고 한다.
비료도 쓰고 살충제도 쓰는 유기농법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 더 정성 들여 키운 작물이려니, 좀 더 지구와 땅에 이로우려니 싶어 유기농 농산물에 손을 뻗었다가도 결국 내려놓아 버리는 건, 플라스틱이라는 복병 때문이다. 대체로 적은 양을 비닐과 플라스틱의 환장 콜라보로 단단하게 포장해놓은 유기농 농산물. 그 앞에서 제로 웨이스터는 오랜 시간 서성이다가 결국 한숨 쉬고 돌아서 버리곤 했다. 유기농 작물을 그나마 박스 단위로 사면 플라스틱과 비닐을 줄일 수 있겠으나 2인 가족인 우리 집으로서는 너무 많은 양이다. 긴 번민 끝에 차라리 재래시장에서 단단한 포장도 없고 연두색 유기농 마크도 없는 평범한 농산물을 사다가 정성 들여 씻어 먹는 쪽을 택했다.
이런 연유로 유기농과는 적당히 거리를 두며 사는 나지만, 들으면 하염없이 가슴이 설레는 단어가 있다. 바로 ‘자연 재배’다.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라는 책을 읽고 그 개념을 처음 접했다. 저자 이타루씨는 일본 돗토리현에서 실험적인 빵집을 운영하는 제빵사다.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이스트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에서 직접 채종한 천연 균으로 빵을 굽는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재료를 최저가 제품으로 멀리서 배송받지 않기로 했다. 대신 빵집 주변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이웃 농부들의 농산물을 구입한다. 그렇게 완성된 이타루씨의 빵은 값이 비싸긴 하지만, 팔면 팔수록 지역 경제에 돈을 순환시키는 기특하고 멋진 빵이다.
천연 효모종 빵을 선전하는 빵집은 이미 많다. 이타루씨가 과거 제빵기술을 배우려고 견습생으로 들어간 빵집 중 하나도 천연 효모종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빵집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공장에서 받아 온 효모였다는 것이 반전. 그럼에도 법적인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법의 허점을 틈타 공장에서 납품받는 ‘천연’이라는 단어에 거짓과 기만을 느낀 이타루씨는 자신의 빵집을 열고 진짜 천연 누룩균을 찾아 나선다.
찐쌀을 대나무통에 담아 놓고 시간이 흐르자 그 위로 균들이 내려앉아 울긋불긋 곰팡이가 폈다. 검고, 붉고, 푸르른 곰팡이에 일일이 혀를 대 맛을 보며 빵을 발효시킬 힘을 지닌 균을 찾아내는 것도 어려웠지만, 더 어려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직접 채종한 천연 누룩균으로 만든 주종을 밀가루 반죽에 섞자, 부풀기는커녕 글루텐까지 죄다 분해되어 점성도 탄력도 없이 흐물흐물해지는 기묘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생각지 못한 위기에 봉착한 이타루씨에게 이웃에 살던 한 농부가 힌트를 준다. 그가 내민 쌀자루에는 ‘자연재배 쌀’이라는 글귀가 붙어있었다.
“산과 들에 있는 꽃과 나무는 비료를 안 줘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 식물이 뿌리를 내린 토양에 수많은 벌레, 균류, 미생물들이 사는 풍부한 생태계가 있고, 그 덕에 식물이 잘 자라니까 건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거야. 비료는 없어도 토양 조건만 좋으면 작물은 자라게 되어 있어. 비료를 안 주고 작물이 제 힘으로 자라게 하는 게 자연재배의 제일 큰 특징인 셈이지.”
“그렇게 하면 뭐가 어떻게 되는데요?”
“비료를 안 준 작물은 살기 위해서 흙에서 양분을 얻으려고 필사적으로 뿌리를 내리지. 작물 스스로가 자기 안에 숨은 생명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살아보려 한다는 거야. 그 생명력이 자손을 남기기 위한 과실이나 씨앗으로 결실을 맺는 거지. 생명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한 톨 한 톨에 모든 생명력을 응집시킨다는 말이야.”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中
이것마저 실패하면 가게를 접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타루씨는 평소 쓰던 유기재배쌀이 아닌, 자연재배쌀로 주종을 만들었다. 약 한 달만에 완성된 주종을 섞어 빵 반죽을 만든 다음 날 아침, 이타루씨와 부인 마리씨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의 실패가 모두 거짓말이라는 듯 반죽은 두둥실 부드럽게 부풀어 있었다. 그 반죽으로 빵을 굽자 빵틀에서 터져 나올 듯 풍성한 빵이 완성되었다. 이타루씨는 그 차이를 아래와 같이 해석했다.
“자기 안에 있는 힘으로 자라고, 강한 생명력을 지닌 작물은 발효를 하게 된다. 생명력이 강한 것들은 균에 의해 분해되는 과정에서 생명력을 유지하여 생명을 키우는 힘을 그대로 남겨둔다. 그래서 식품으로 적합하다. 반대로 외부에서 비료를 받아 억지로 살이 오른, 생명력이 부족한 것들은 부패로 방향을 잡는다. (중략) 우리가 들여온 유기재배 쌀은 대량의 동물성 퇴비(단백질)를 먹고 자랐다. 그래서 영양과다 상태, 생명력이 약한 상태였던 것이다. 산과 들에는 대량의 동물성 퇴비 따위는 없다. 따라서 작물에 단백질이 포함되는 비정상적인 사태를 천연 누룩균이 감지하면 ‘이상하다. 분해해서 흙으로 되돌리자.’라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비료와 농약의 도움 없이 노지에서 오직 식물 내면의 생명력으로만 강인하게 자라길 바라야 하는 자연재배 농법. 말이 쉽지, 그런 방식의 농사를 짓는다는 건 얼마나 어렵고 기약 없는 일일까. 게다가 들이는 수고에 비해 많이 환영받지 못한다. 일단, 가격이 높다. 그뿐 아니라…….
마르쉐에서 반갑게도 자연 재배한 루콜라를 만나서 조금 사 온 적 있는데 한 장 한 장 손질하다가 그만 쓴웃음이 나와버렸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흩뿌려주던 여리여리한 이파리들이 아니다. 작은 군인들처럼 굳셌으며 생김새도 제각각. 내 손바닥만큼 커다란 이파리도 있고 혼자서 훌쩍 키만 큰 녀석도 있었다. 게다가 가장 크리티컬한 포인트는 모든 이파리에 송송송 자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것. 끝내주게 맛있는 루콜라가 틀림없나 보다. 벌레들이 먼저 많이도 시식한 걸 보면. 그러나 생각을 전환해보면 그 구멍들이 진실한 무농약, 무살충제 인증이 아닌가? 흠 없이 매끈 반듯한 유기농 작물에 붙어있는 초록색 ‘친환경’ 스티커 따위보다 훨씬 더 미덥다.
언젠가는 자연 재배한 사과를 만나 구매한 적 있는데 만약 이게 자연에서 온 사과의 민낯이라면 ‘사과 같은 내 얼굴’이라는 동요는 ‘셀프 디스’가 될 것이다. 비료를 쓰지 않아서 시중 사과보다 크기가 훨씬 작았고 인위적인 조처를 하지 않은 탓인지 껍질은 거칠거칠 울긋불긋한 곰보였다. 자연 속 햇살과 비바람을 오롯이 혼자 이겨낸 장군의 철갑이오, 훈장 같은 그 껍질은 예쁘지 않았다. 그러나 멋있었다.
높은 가격, 곱지 않은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자연재배로 자란 진짜배기를 만나면 지갑을 또 열어 버린다. 강한 생명력의 응집을 맛보고 싶고, 어려운 길을 택한 농부님에게도 응원을 보내고 싶어 속절없이 가슴이 뛰는 걸 어찌하리오. 지인 M님께서 땅끝 해남에 무 제초제, 무살충제, 무 퇴비, 무 비닐멀칭으로 단호박을 재배하는 농부님이 계시다는 걸 귀띔해주셨을 때도 딱 그랬다. 가격을 들었을 때 솔직히 ‘헙’ 놀랐지만 말이다. 당장 주문해서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호박이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클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비로소 받을 수 있단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예약을 한 후였다.
그 후로 한 달쯤 지났을까, 드디어 단호박을 수확할 때가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애석하게도 보름 전 이상저온으로 갑자기 우박이 내려서 어린 단호박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그중 살아남은 귀한 단호박들이 내게 올 예정이란다. M님께서는 종자를 채취할 단호박도 부족해진 농부님 사정을 설명해주시며 우리가 단호박 씨앗을 모았다가 농부님께 돌려 드리자고 했고 나는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했다.
땅끝에서 출발한 커다란 상자 하나가 며칠 뒤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 속에는 단호박 세 개가 투박하게 담겨 있었다. 그런데 모양이 내가 알던 그 단호박이 아니다. 일단 크기부터 일반 단호박보다 서너 배는 크다. 무게는 두 팔로 안아 들어야 할 만큼 묵직하다. 껍질도 진한 초록색이 아니라 탁한 연두색. 알고 보니 이건 ‘상리 단호박’이라는 우리나라 토종 품종이었다. 생김새는 낯설지만 속은 노랗고 맛있다고 하니 안심해도 되겠다.
칼끝에 힘을 주고 단호박을 반으로 쩍 갈랐다. 숟가락으로 속을 긁어내자 샛노랗게 질척거리는 가운데 부분에 잘 여문 씨앗이 한가득 들어있다. 씨앗을 잘 골라내어 채반에 받쳐 흐르는 물로 씻은 후 탁탁 물기를 털어 볕 잘 드는 창가에 두었다. 이타루씨 책에 나온 공장 출신 천연 효모처럼, 땅에 뿌리는 씨앗도 공장에서 나와 사고파는 시대다. 거대 기업 몬산토에서 파는 씨앗은 결과물이 일정하게 보장된 제품이지만 유전자조작을 해서 한 번밖에 싹 틔울 수 없는 씨앗이라고 한다. 농부들이 씨앗을 받아 다시 키울 수 없도록 막은 것이다. 상리 단호박 같은 우리나라 토종 품종이 낯설고 비싸다고 소비자들이 외면한다면 이런 토종 씨앗도 사라지고, 결국 규격화된 일회용 씨앗만 땅에 뿌려지는 세상이 올까봐 무섭다. 그런 생각을 하고 다시 보니 물기 젖어 반짝이는 연노란 씨앗들이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닮았다. 땅끝으로 되돌아가 내년에 다시 힘차게 움틀 씩씩한 씨앗들을 격려하듯 손가락 끝으로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스테인리스 냄비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채 썬 양파를 넣고 약한 불에서 오래 볶는다. 양파가 연한 갈색으로 변할 때쯤 깍둑 썬 단호박을 넣고 잠시 더 볶다가 물 두 컵을 부으면 경쾌한 차르르, 소리와 함께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동시에 근사한 향기가 피어오른다. 베지 스톡 하나를 부숴 넣고 단호박이 푹 익을 때까지 뚜껑을 덮고 끓인다. 단호박이 다 익으면 두유를 두 컵 붓고 핸드믹서를 이용해서 냄비 속 내용물을 다 같이 갈아준다. 소금을 조금 넣어 간을 맞추자 은은한 단짠맛이 매력인 비건 단호박 수프가 완성됐다. 넉넉히 만들었으니 반찬통에 소분해서 냉동실에 얼려 두면 되겠다. 전날 저녁에 꺼내두면 다음 날 아침에 따끈하게 데워 먹기 좋다.
두 번째 단호박으로는 비건 블로그에서 봤던 닭 없는 찜닭(남편은 그런 모순적인 작명법은 있을 수 없다며 그건 그냥 ‘찜’, 또는 ‘찜○’이라고 주장하지만)을 만들어 봐야지 싶었다. 납작 당면을 꺼내 물에 불려 놓고 얼른 시장에 다녀왔다. 양파, 감자, 버섯은 도톰하게 썰고 대파는 손가락 길이 정도로 큼직하게 썰어 준비한 후 마지막으로 칼을 들어 단호박을 힘차게 반으로 갈랐다. 쯔어억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갈라진 단호박의 샛노란 속살과 그 속에 가득한 씨앗… 까지는 좋았는데
그것은 꼬물락?
이었을까 아님,
꿈틀? 이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그 기척을 느낀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 박 속에서 튀어나온 도깨비를 조우한 놀부 부인처럼 얼굴은 시퍼런 사색이 된 채로.
‘애애애… 애벌레가 있어… 호박 속에…’
어렸을 적 벌레를 보고 놀라서 난리를 치면 아빠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괜찮아. 네가 훨씬 커. 저 벌레가 널 보고 놀랐을 거야.”
맞는 말씀이다. 난 키 167㎝의 거대한 인간이란 걸 자각하며 놀란 가슴을 애써 부여잡았다. 이성을 찾고 다시 단호박으로 다가갔다. 녀석의 길이는 약 5mm 정도였고 그동안 단호박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는지 그 통통한 몸은 호박 속과 똑같은 연한 노란빛을 띠었다. ‘Love and Peace’를 실천하고자 비 갠 후 보도블록에서 갈 길 잃은 채 말라 죽어가는 지렁이를 몇 번 긴급구조한 경력(손수건으로 집어서 얼른 화단으로 던져 버린 정도지만)도 있는 나였기에 처음에는 애벌레를 방생하고자 했다. 하지만, 생포를 위해 떨리는 손길을 뻗자
폴짝-!!!
동시에 나도 ‘끄아악’ 내적 비명을 지르며 풀쩍 뛰어 후퇴했다.
‘이 녀석… 튀어 오른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면서, 튀어 오르다니 이건 좀……. 간담 서늘했던 반전이었다. 하지만 고작 5mm짜리가 ‘뛰어봤자 벼룩이지’. 노란 단호박 속살에 안착하여 다시금 해피하게 꼬물거린다. 이 단호박은 모든 생명체에게 진정 ‘무해’하다는 것이 이런 방법으로 입증되는구나.
결국 눈 딱 감고 너를 안락사시키기로 했다. 자세한 과정은 굳이 글로 설명하지 않겠다. 그런데 처리하고 나자 이 한 마리가 전부일 리 없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단호박 속을 숟가락으로 긁어내는 과정에서 통통이 몇 마리를 더 잡고 나서야 비로소 난(亂)이 진압됐다. 이런 순간에조차 성실한 나는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농부님께 보낼 잘 여문 씨앗 몇 개를 골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간장과 설탕, 생강술, 다진마늘, 청양고추를 다져 넣은 양념에 물 한 컵을 넣고 부글부글 끓이자 냄비에서는 익숙한 그 찜닭 향기가 피어오른다. 닭이 없는데도 말이다. 딱딱한 감자를 먼저 넣어 익을 시간을 주고 뒤이어 단호박을 넣었다. 깨끗하게 손질해서 자른 단호박의 노란 단면을 보고 있자니 아까의 전쟁 같은 기억은 거짓말만 같았다. 그저 예쁘기만 하다. 냄비 속 감자와 단호박이 거진 익었다 싶을 때 새송이와 표고, 그리고 투명하게 불린 납작 당면, 대파를 넣어 조금만 더 끓였더니 닭 없는 찜닭, 아니, 찜○이 완성됐다.
식사 후 부른 배를 통통 두들기며(네, 제가 참 비위가 좋습니다. 허허.) 스마트폰으로 ‘단호박 애’까지만 쳤더니 자동 검색어 완성으로 ‘단호박 애벌레’가 완성되어서 깜짝 놀랐다. 의외로 대중적인 녀석이었던가! 역시 인터넷에는 역시 없는 것이 없다. 그 이름도 쉽게 알아냈다. 바로 ‘호박과실파리’. 박과 식물들의 껍질이 딱딱해지기 전, 그 속에 알을 낳는다고 한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호박을 재배하기 전에 토양에 농약을 뿌리고, 파리가 날아다니는 시기에 또 농약을 살포해야 한다고. 우리가 먹는 깨끗한 호박에는 사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비건 지향 채식을 하면서 가끔 오만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내가 택한 먹거리는 동물을 죽이지 않았다는 자부심과 내가 입에 넣는 먹거리는 무해하고 친환경적이라는 뿌듯함으로 가슴 속이 부풀고 코가 한껏 높아지는 순간들. 하지만 애벌레는커녕, 벌레 먹은 구멍 하나 없이 일정한 크기로 매끈하게 빛나는 채소들은 사실 굉장히 인공적인 결과물이다. 소위 유기농 작물일지라도 말이다. 마치 루이 16세의 정원과 같다. 깎은 듯 잘 정돈된 그 정원을 거니는 누군가가 ‘자연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나는 지금 자연 그대로를 만끽하는 중이구나.’ 착각한다면 우스운 모습일 것이다. 섣부른 자부심과 뿌듯함으로 쉬이 달떴던 내 마음도 그렇다.
지구와 나 자신을 위해 무농약, 무비료, 햇살 아래 노지재배로 자란 생명력 가득한 채소로만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격이 높고 구하기 어려운 것을 차치하더라도 행복하고 건강한 애벌레, 민달팽이 등을 더 자주 진압하기엔 내 담력이 미천하여 보통은 적당히 농약도 쓰고 적당히 비료도 썼을 곱고 매끈한 채소를 재래시장에서 산다.
그래도 그것들을 먹을 때마다 보이지 않게 스러졌을 작은 생명들도 잊지 않으려 한다. 감히 인간을 위한 식물 주위를 얼씬거리며 꼬물거렸거나 날아다녔거나 먼저 한입 먹으려 했다는 죄로 죽어야 했던 미물들. 한 덩어리의 채소 뒤에는 그런 생명들의 무게가 소리도 없이 존재했다. 그들을 기리며 내가 하는 것은 그저 이파리 한쪽, 곡식 한 톨이라도 헛되이 버려지지 않게 귀하게 아끼고 남김없이 먹는 것이다. 이러다 또 가끔은 속절없이 설레고 가슴이 뛰어 못 배기겠다며 자연 재배 작물을 덜컥 사기도 하겠지.
‘어어어, 이렇게 그냥 글이 끝나는 거야?’
그렇습니다. 예리한 독자님이라면 단호박이 원래 3개가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겠죠? 고로,
신(臣)에게는 아직 한 통의 자연 재배 단호박이 남아 있습니다.
슬근슬근 첫 번째 박을 열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슬근슬근 두 번째 박을 열자 통통이들이 꼬물거렸다. 그럼 슬근슬근 세 번째 박을 열면?!?!
사실 나도 아직 모른다. 이 글을 쓴 다음에 세 번째 단호박을 열어 볼 예정이다. 참고로, 셋 중에 가장 크기가 큰 녀석이다. 그 속이 평화로운 마을일지 아니면 난리가 났을지는 열기 전엔 알 수 없는 일이다. 여하튼 비장한 장수의 마음으로 마지막 칼을 들어 보려 한다. 그러므로 이 난중일기는 열린 결말 비스무리한 것이 되었다. 독자들이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를 드리는 작가의 배려라고 여겨 주세요. 자, 이만 가보겠습니다. 전운(戰運)을 빌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