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ainmaker
Oct 18. 2024
연필화에 대한 회상과 삶
처음으로 내가 그린 연필화에 만족스러웠던 때가 있다.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때 나는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고 있었다. ‘무기여 잘 있거라’였다. 소설을 읽는 것은 숨을 쉬는 것과 같다고 그때 생각했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과 간호사와의 사랑이야기는 내 호흡을 송두리째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둘 사이의 운명과 그 작품의 마지막문장은 그런 내 호흡이 송두리째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는 흡입력이 강한 소년이었고, 이제 막 사춘기의 문지방을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조금 쓸쓸했고, 그 쓸쓸함 위로 고립된 내가 방치되어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스케치북이 책상 위에 펴져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연필을 들었다. 한참 동안 낑낑거렸던 나는 마침내 그림 한 점을 완성했다. 나는 흡족했고 너무 만족스러웠다. 하얀 종이 위에는 성모 마리아가 지금 막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탄생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성당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도심 속 성당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순전히 막막한 저 허공 속으로 끝없이 퍼져나가는 종소리를 듣기 위해서. 종소리는 사라질 수도 있었던 내 호흡의 위기를 다시 끄집어 내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그림을 그린 순간을 잊을 수 없게 해 준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그 그림을 한쪽 벽에 붙여두고 감상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남녀 주인공은 그렇게 해서 한동안 불멸의 존재처럼 그 그림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연필로 그린 그림 하나가 나에게 있어서 삶, 바로 인생이었다. 내 생활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그림은 그 후로 한참이 지나서 그려졌다. 그것도 연필화였다. 친구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었다. 1980년대를 온전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경이로운 꿈이었던 시절, 나는 서울의 봉천동 친구의 자취방에서 그의 시를 읽게 되었다. 그의 생활이 삶이 되어 또다시 언어로 부활되어 있는 현장은 최루탄보다 더 치명적인 두꺼운 안개가 싸여 한 치 앞을 들여다보기 힘겨웠다.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위안은 무엇도 없었다. 나는 참다란 심경을 안고 하얀 종이 위에 그의 얼굴을 그렸다. 그림이 완성되자 그는 ‘무진기행’ 속의 안개보다도 깊은 자기 방의 안개를 손으로 휘휘 저으며 한쪽 벽으로 걸어가서는 연필화를 붙였다. 그때 그는 얼굴이 잠시 허물어졌는데 그것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그와의 소통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어느 땐가 나는 그와 나에 대한 단상을 이렇게 기록해 보기도 했다.
***<...내게도 가슴 저린 도시, 순천이 있었을까?...
사물을 관조하고, 그 출구를 통하여 내면의 세계를 여과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은 어찌할 수 없다. 특히 젊은 날에는 이러한 일면들이 세밀하게 얽히면서 각자의 개성에 어우러져 생의 과정을 만들어간다. 순천. 내가 순천에서의 생활을 이제 막 시작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친구가 찾아왔다. 그는 그때까지 대학교생활을 하고 있었고, 나는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그 친구는 군대 제대 후 팔 년이 지나서야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사연이 많은 그의 대학생활만큼 내 직장생활에도 사연이 많았다. 그는 멕시코의 판초 빌라와 남미 아르헨티나의 혁명가 체 게바라와 노동자 전태일에 몰입해서 대부분의 젊음을 보냈다. 그러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대학생활 십 년이었다. 그 기간은 팔십 년대의 암울한 시절이 고스란히 그의 어깨에 걸려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그의 어깨에는 그 시절들이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 직장생활에서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그때 그가 순천에 내려와서 힘겹게 말문을 던졌는데, 그 말문 말미에 시인 기형도가 언급되었다.
- 순천..이곳에서 기형도가 말년을 지냈다. 그는 이곳에서 녹색의 권태에 질렸어. 아마 계절상 이즈음이었지...
성하의 문턱에서 순천은 말 그대로 녹색의 권태를 내뿜어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여름, 나는 친구가 남기고 간 기형도 시인에 대한 연민을 가슴에 담기에는 너무도 힘겨웠다. 그러면서 내가 의지해야 할 무엇인가가 필요했기에 나는 그 절박함에 함몰하고 싶었다. 정말 그랬다.
- 우리가 기형도처럼 살 수는 없지만, 지금은...봄이 오지 않는 지금은.. 기형도가 살았던 시절처럼 젖어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그처럼 정직해지고 싶다.
친구는 그때의 절박함이 나보다 더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말을 남기고 그는 서울로 떠났다. 나는 한동안 친구가 남기고 간 말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면서 내가 의지해야 할 무엇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나는 나의 방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삶에 대한 나의 태도와 나의 선택과 나의 눈물이 정말로 절실했다. 나는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이 적어도 내 절실함에 대한 해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 중앙의 과녁을 조금 벗어난 10점 만점에서 6점짜리에 근접한 점수를 보여주었다. 나는 비로소 힘을 얻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 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한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 엄마걱정 >
평론가 김현, 그는 기형도의 시, 그 시의 모든 곳에서 선연하게 드러나는 서정에서는 탈출구가 없는 사실이 기형도를 시인으로 존재하게 했다고 말한 듯하다. 김현에 의해서 조명되는 행운을 듬뿍 받은 시인은 젊은 어느 날 평론가 김현을 당황하게 만드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평론가는 시인 기형도를 다시 반추하는 평론을 아름답게 썼다. 그것은 그의 최후에 대한 아름다운 진혼곡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관련들이 그 친구를 기형도의 <빈집>처럼 만들어 주었을까? 빈집인 채로 나를 찾아 순천까지 왔던 친구는, 어쩌면 그때에도 내가 첨예하게 생활하고 있는 순천이 아마도 시인 기형도가 녹색의 권태에 짓눌려 지냈던 그 도시,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가 기형도를 찾았을 만큼 80년대를, 그의 대학시절을, 그의 청춘을 그렇게 방황하고 있었음이 중요하다. 나는 그러한 그를 이해한다.
나는 내 젊은 날을 탈출구에 의지했다. 김현이 바라본 기형도의 시에 안개처럼 가라앉아버린 존재할 수 없는 비상탈출구, 그것은 기형도 시인의 소유물이지 나의 것과는 달랐던 것이다. 나는 탈출구가 존재했다. 그 극적인 비상탈출구가 내 손끝 저만치에서 한 가닥 위안을 던져주는 안전등처럼 점멸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소진되어 가는 불빛을 찾아 다시 점등을 해야 한다고 눈물을 흘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사물을 관조하는 방식이었고 나는 그것만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한 마리 개똥벌레가 허공을 유영하며 여린 불빛을 남기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은하수를 이루고 있는 밤하늘을 보았다. 시인 기형도에게는 그것이 <티밥>과 같았지만 나에게는 내 온 가슴을 후벼대는 뜨거운 <꽃>들이었다. 나는 나만이 품고 있었던 나의 터널을 나왔다. 그 꽃들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뚜벅뚜벅. 그 발자국소리가 여전히 선명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 번째 그림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연필화였다. 자칭 ‘레드 콤플렉스’를 앓고 있던 그는 내 친구이기도 했다. 말이 레드 콤플렉스지 그는 우리보다 더 심각하게 평등의 사회를 갈망했다. 불평등에 대한 사실을 목도할수록 그의 소지품의 목록은 하나둘씩 늘어났다. 일테면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자본론’ ‘제3세계의 경제’ 등의 책들이 그것이었다. 그가 선택한 신문방송학과는 그가 레드 콤플렉스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즉 그는 ‘레드’로 지칭되는 금지된 구역에 대한 사상을, 그 속에 녹아있는 인민들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간간히 그가 ‘레드 콤플렉스’를 울먹거리듯 이야기하곤 했던 것은 그가 그것을 자신의 인생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 그림의 주인공은 내 그림을 벽에다 붙이지는 않았다. 대신 오래도록 어딘가에 간직했는지는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그린 그림은 이렇게 세 점이었다. 연필로 그린 세 점의 그림이 내 삶이었던 그 시절을 통해 딱 세 점을 그릴 수 있었고, 그 후로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연필화를 그리지 않았다. 아니 그릴 수 없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결혼을 하고 싶었고, 집을 갖고 싶었고, 아이들을 낳고 싶었고, 차를 구입해서 쉬는 날이면 언제라도 어디든지 가고 싶었다. 그 그간동안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그가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회사라는 곳에 다녀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나는 소설가, 화가, 시인 지망생들처럼 예술에 녹아들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자신의 치열한 취미를 한껏 고양시켜 가는 이 부류의 사람들이 영위하는 삶을 누릴 수 없었다.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직장이라는 곳에 나가게 되면서 그 생활이 삶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내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 어찌 직장생활에 대한 사직을 문득문득 갈망했겠는가.
예술가들이라고 세상사에 마냥 순진하지는 않았다. 음악가 바그너는 정치와 권력에 대한 향수를 떠날 수 없어서 음악가의 길을 선택했다 한다. 궁중음악가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그의 음악을 성숙시켰다. 일테면 일본 최고의 바둑, 본인방의 명맥이 집권세력인 무인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지켜져 왔던 것과 다름없다. 아울러 ‘만종’으로 이름을 남긴 밀레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농부만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프랑스 민중미술가로 불렸고, 그는 그렇게 불리는 특권을 톡톡히 누리는 것을 받아들였다. 예술가로서의 길이, 이 삶이 곧 그의 생활이 된 것이다.
세 점의 연필화를 통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을 만났던 시절은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직장이라는 곳에 나가게 되면서 그 생활이 삶이 되고 있는 나로서는 그때의 기억 속에 묻어있는 진실을 기록해 본 것뿐이다.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내가 다시는 연필화를 그리지 않았던 이유가 명확했던 것만큼 연필화를 그리면서 영위할 수 있는 삶은 온전한 내 삶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