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기르는 마음의 무중력
어떤 마음으로 일련의 글을 써 볼까 잠시 생각하다가
나에게서 글이 되어 나올 수 있는 것들의 관통축을 하나의 단어로 써 보자 생각했다.
그것은 '무중력'
한자어라 말의 모양새가 썩 예쁘지는 않지만...
나에게 주어진 몇 가지 삶의 중력들, 그 꺼리들에 나름 나름 내 나름의 초연함을 대면시켜 대화해 보는 장으로 이 공간을 사용해 보기 시작할까 한다.
내가 관통하고 있는 삶의 중력들, 그 꺼리들을 풀어서 말하면
창작자로, 연구자로 예술의 희망 혹은 절망을 마주하는 일,
이십 년의 세월 격차가 있는 무리의 사람들에게서 희망 혹은 실망을 창조시키는 사람으로 대상화되는 일,
사십 년 간 떠나온 적 없는 도시를 처음 떠나 새로운 도시에서 이방의 감각으로 외동 아이를 기르며 소소한 사회화에 기뻐하거나 조바심을 치는 일...
그러한 것들이다.
구체적인 자기 소개의 목록이 될 수 있는 '이름'들의 뒷면에는 위에 적은 보다 사실적인 삶의 '중력'들이 자리잡고 있으니 이것으로 간단한 소개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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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는 아이를 기르는 마음의 무중력을 위하여-
'자기'애가 강한 자의 모(부)성애는 사실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끝내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향한 마음을 자꾸만 견인해 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쩌면 사랑 자체의 의미이다.
사랑은 바깥을 향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배웠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조차도 나의 바깥을 향하는 마음으로 열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아마도 진정한 자기'애'일 것이다.
그러한 것이 사랑임을 터득하는 순간이라면 쉽게 '사랑'이라는 마음을 힘주어 주장하거나 사용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내가 비로소 나의 바깥을 향하게 된 순간에 어찌 내 마음을 잡으려 하겠는가?
또한, 그 마음 앞에 '나'라는 주어를 부착하는 일은 얼마나 낯부끄러운 일인가?
아이와 마주하는 그 숱한 투명한 순간은 비로소 '자기'라는 투과막이 남루한 혼잣말만 읊조리는 걸인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게 되는 순간이다.
작은 것에 몰입하여 기뻐하는 아이
작은 것에 몰입하여 희망을 가지는 아이
작은 것에 몰입하여 절망할 줄 아는 아이
그렇다고 그 작은 것들을 크게 느끼며 감히 무언가의 크기를 가늠하지 않는 아이
그래서 쉬이 절망이 다시 희망이 되고 다시 희망이 절망으로 이어져서 그 어떠한 것에도 매이지 않고 흐르는 아이.
그렇게 흐르고 몰입하고 다시 몰입하며 흐르는 아이를 아주 가까운 곁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사람이 단지 부모이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굳이 아이를 기르지 않아도 늘 흐르는 존재-이를테면 '나무'이거나 '신'과 같은...-를 가까운 곁에 두고 사는 사람은 아이를 기르는 사람과 동등한 마주함을 경험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육아 서사에는 부모 주어가 많을까? (육+아.라는 단어조차 아이를 대상화시키는 단어이니)
아이를 가르치려는 부모
다른 부모를 가르치려는 부모
모자란 자신을 가르치려는 부모
무엇이 되었든 부모가 주어이다.
아이와 마주하는 그 투명한 시간의 강인함에 공감하며
그 강인함으로 인해 오늘도 나를 잃고 아이와 만났다며 함께 경이로워 할 수 있는 사람
우리 아이는 이러한 투명함이 있는데 다른 아이는 어떠한 투명함이 있을까를 궁금해 하며 서로의 아이를 궁금해 하고 동시에 서로의 부모됨을 궁금해 할 수 있는 사람
그러한 궁금함으로 가득 찬 놀이터 벤치를, 어린이집 부모 모임을 한 번 상상해 본다.
(그것은 분명 비현실적인 풍경이지만 상상만큼은 중단하고 싶지 않은 정말정말 행복한 장면이다.)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이나 상대 아이와 내 아이를 경쟁 구도로 읽는 마음, 육아의 노곤함을 토로하는 마음,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며 죄책감을 느끼는 '나'로 가득찬 마음이 아니고.
사실 어떠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아이들의 놀이터는 그저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