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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Sep 28. 2023

단돈 5천 원으로 즐기는 몽골에서의 영화생활

내가배고픈것을보지못하는사람들#3

한식, 한식을 먹자!

 늦은 아침 눈을 뜨자마자 생각한 건 그거였다. 한식을 먹어야겠다. 딱히 몽골에 와서 음식 자체에 대한 불만을 느낀 건 아니다. 아롤이라던가 수테차는 아직 소화해 내기 힘들었지만 고기음식이 주인 몽골의 음식들은 굉장히 내 취향이었던 거다. 죽이든 칼국수든 만둣국이든 안에 맛있는 고기가 들어가니 전부 맛있더라. 잘 익은 감자나 당근은 덤이고.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식을 생각하게 된 것은, 정확히 말하면 제육이 생각난 것은 이전에 한국에서 친구랑 먹었던 제육볶음 한식집이 생각난 탓이었다. 한 번 머릿속에 떠오른 제육 이미지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어차피 다시 시골에 가면 제육은 먹지도 못할 텐데 그나마 식당이 많은 울란바토르에 주둔해 있을 때 시도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살고 있던 기숙사에서 10분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제주숯불갈비’라는 이름의 한식 식당이 있었다. 소주와 반짇고리, 그리고 한복이 그저 나열되어 있는 팻말을 보고 나는 이곳이 맛집일 지도 모른다는 선택적 희망에 부풀었다. 제주숯불갈비집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비밀스러웠다. 대놓고 벽에 이쪽으로 가라며 화살표를 그려놓지 않았다면 끊임없이 지도를 의심하며 뒤로 갔다 앞으로 가기를 반복했을 거다.


 그런데 이렇게 절망적일 수가, 썰렁한 가게 안으로 어색하게 들어가 자리에 앉고 메뉴판까지 받았고 한국어로 적힌 제육볶음까지 찾아냈다. 그런데 그 아래에 수상한 숫자가 쓰여있는 거다. ‘2 어쩌고’라고. 불안한 느낌에 다른 음식에서 똑같은 '어쩌고'를 찾았는데 소고기 뚝배기 같은 경우에는 '1 어쩌구'라고 쓰여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육볶음은 2인부터 식사가 가능한 거다. 혹시 1인분을 불가능하냐고 조심스럽게 여쭤봤지만 그건 힘들다는 난처한 미소만이 돌아왔다. 나는 2인분을 시키고, 나머지 1인분은 포장이 가능하냐고 물어봤다. 이전에 안 나와 국수와 양고기를 먹었을 때도 양고기를 포장했으니까. 다행히도 그건 가능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제육볶음 2인분과 스스로 포장해 갈 수 있는 용기가 나왔다.


 냄새 합격. 색깔 합격. 여러 가지 밑반찬들 합격. 그런데 유일하게 합격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마늘의 유무였다. 맛은 분명 제육볶음이긴 한데 어딘가 10퍼센트 부족한 느낌이 들어 가만히 제육을 음미해 보았다. 마늘. 한국이라면 거의 모든 곳에 넣는 필수 재료인 마늘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맛없냐고 물어본다면 미묘하게 그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이거 맛있는데?!'라고 말하기에는 철저히 한국인 입맛인 나에게는 많이 부족했던 거다. 오히려 밑반찬으로 나온 호박과 콩나물이 더 맛있어서 추가할 정도였는데, 결국 남은 음식을 싸서 집으로 가져갔지만 그걸 내가 자발적으로 편의점에서 몰래 돌려 먹는 일은 없었다.

 나중에 몽골인 친구들이 '몽골에서의 한국 음식'이 어떠냐고 질문을 하기에 마늘이 없어서 많이 부족하다고 말했는데 오히려 그 친구들은 '몽골인들은 마늘이 없는 몽골식 한국 음식'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아마도 한국 사람들이 '한국식 뫄뫄 음식'을 더 좋아하는 것과 같은 논리겠지? 나는 거기서 잠시 마늘의 엄청남에 대해 일장연설을 할까 하다, 그걸 영어로 표현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 것 같아 얌전히 이것이 문화차이임을 받아들였다.




그때쯤이라니 그게 대체 언젠데!


 아무런 계획이 없는 날이라고 하면 정확하다. 안나와 기차 여행을 가기 전 우연히 만나 인스타그램을 주고받은 친구와 놀까도 생각했으나 잘 모르는 몽골인과의 약속이 높은 확률로 얼마나 스트레스받는 일인지.

 일단 연락을 잘 보지 않는다. 잘 이야기하다가도 막상 '그럼 몇 시에 볼까?' 등의 말을 꺼내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다른 말만 했다. 대충 그때쯤. 이 말이 내가 이곳에서 제일 많이 들은 말들 중 하나다. 대충 그때쯤이라니. '홍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저녁 6시에 보자.'라는 식의 약속이 기본인 한국인으로서는 그 말처럼 스트레스 쌓이는 말들도 없다. 심지어 오후쯤에 보자는 말을 믿고 혼자 돌아다니다가 '오후쯤'에 연락해 언제 볼지에 대해 물어보면 잠잠하다 저녁에 자신이 세차를 하고 있는 사진을 보내주며 '지금 세차를 하고 있어.'라는 말로 답했다.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있으면 이제 저녁 9시쯤에 연락이 오는 거다.


 "지금 맥주 마실래?"


 마시겠냐.



 그런 고로 이날은 내가 아직 가지 못한 곳으로 걸어가 보는 날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자이승 전승 기념탑. 몽골 사회주의 혁명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이곳은 언덕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울란바토르 시내가 한눈에 다 보였다. 올라가는 길에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목탄연필로 스윽스윽 그릴 때마다 말의 갈기가 생기는 것이 정말 신기했지만 혹시 값을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관광객적 마인드로 인해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꼭대기로 올라가니 울란바토르 시내투어 중인 한 한국인 집단이 보였다. 가운데를 구경하는 척하면서 가이드의 말을 훔쳐들었는데, 대충 이곳에서 어디를 바라보면 제일 땅값이 비싼 곳이고 어느 지역은 게르 지역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조금 더 빨리 왔으면 벽화에 대한 설명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날도 적당히 서늘하니 좋고 햇빛도 잘 들지 않고 주변에 사람들도 거의 없으니 잠이 솔솔 왔다. 조금만 더 편안한 나무의자였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앉은 곳은 딱딱한 돌의자였다. 여기서 누웠다가는 엄청난 근육통을 얻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올라온 언덕의 반대편으로 가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나왔다. 그런데 이 내려가는 길이라는 것이 정말 어디론가 향할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라 그냥 아래에서 배회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길에 가까웠는데 어찌어찌 길이라고 할 수 있는 돌길은 전부 밟아 내려가도 더 이상 내려갈 수 있는 길은 없는 거다. 그럼에도 몇몇 사람들은 그곳까지 내려와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구경하고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의 목표는 이 불편한 돌에 앉아 경치를 보고 불을 쬐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처럼 가만히. 물론 나는 아니었으므로 다시 거슬러 올라왔다.


공장지대


 자이승 전승 기념탐에서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한 건물로 통하는 길이 나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정 높이 올라온 다음 이 길을 통해서 조금만 등산한다고 했다. 그걸 알아도 나는 등산을 택했겠지만.

 파란색 건물의 이름은 자이산 힐 콤플렉스였는데 이것저것 있는 복합 쇼핑몰이었다. 문을 닫은 것 같기도 하고 운영하는 것 같기도 한 쇼핑몰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다가 나는 그만 영화관을 발견해버리고 말았다.


 타지에서 혼자 영화 보기? 그거 무지하게 멋있잖아.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리 멋있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때의 나는 '타지를 홀로 돌아다니다가 원하는 걸 스윽 선택해서 영화를 보는 나 자신'의 이미지를 꽤나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곤 해도 몽골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내가 몽골영화를 볼 수는 없다. 타지에서 혼영하는 내가 사실 영화 내용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니 조금 안쓰럽지 않은가. 그렇게 고민하던 내 눈에 최근 SNS에서 자주 봤던 빨간 불과 파란 물이 보였다. 엘리멘탈! 영어로 말하고 몽골어로 자막을 띄워준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나는 점원에게 이 영화가 더빙이냐고물어봤다. 그리곤 아니라는 대답이 들려오자마자 바로 결제했다. 12,000투그릭. 영화표 하나가 단돈 5,000원이라니.



 그렇게 일사천리로 영화표를 구매한 나는 바로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나 말고도 영화관 내에는 4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이상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몽골인들은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이때가 목요일 3시 20분이었다.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직장이나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

 생각보다 편안한 의자에 기대어 보고 있자니 3시 20분. 영화가 시작했다. 영화 <UP>에서 나올 것 같은 할아버지와 강아지의 이야기. 그냥 짖기만 하던 강아지가 한국말로 무어라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할아버지는 고민에 빠지는데... 그런데 열심히 보다 보니 뭔가 이상한 거다. 엘리멘탈은 정령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처음에는 인간의 삶에서 필수요소들을 보여주면서 정령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화면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5분이 지나도록 할아버지와 강아지만 주구장창 대화를 하고 있는 거다. 내가 영화관을 잘못 찾았나? 하지만 이곳에 있는 영화관은 2곳 밖에 없었고 이미 직원이 내 표를 확인하고는 이곳으로 들여보낸 상태였다.

 그럼 영화가 잘못 틀어졌나 보구나!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른쪽 끝에 앉아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영화관 밖으로 나가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영화관에서 엉뚱한 영화가 틀어지다니, 진짜 별 일이 다 있나 싶었다. 직원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도 다시 들어와 자리에 앉았으니 이제 다시 엘리멘탈이 틀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할아버지와 강아지가 마무리 같은 멘트를 치더니 아름다운 엔딩을 보여주며(제대로 안 봐서 기억도 나지 않지만) 페이드 아웃을 하는 거다. 그러고 난 다음에 엘리멘탈이 틀어졌다. 이 짧은 단편 영상은 뭐지? 영화 홍보? 아니면 그냥 본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보여주는 단막극? 뭐가 됐든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소였다. 짧은 영상을 10분 동안이나 틀어주다니, 그것도 영화 시작시간인 20분부터 말이다.


문제의 단편영상


 재밌게 영화를 보고 나니 저녁시간대가 됐다. 서늘해져 걷기 좋은 울란바토르 시내를 걷다가 피자헛에서 피자 하나를 샀다. 그리고는 편의점에서 맛있어 보이는 몽골 맥주 4캔을 샀다. 참고로 귀찮다는 이유로 여권을 가지고 오지 않은 나는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알바생의 말에 굉장히 당황했는데, 어차피 못 알아듣는 몽골어 뉘앙스도 못 알아들은 것처럼 '... 예?'를 반복하니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알바생이 그냥 나를 보내줬다.

 그렇게 피자와 함께한 2023년 서울시민리그 여자부 대회 예선전! 나는 몽골에 있기 때문에 내가 뛴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인지 맥주가 술술 넘어가더라. 몽골까지 와서 동호회의 농구 영상을 찾아보는 멤버가 있어서 행복한 우리 동호회.




친구들이 오기 전에 카페를 찾아볼까? 근데 이제 공사중이고 문 닫고 사라진.

 그렇게 밤새 농구 영상을 보며 맥주 4캔을 들이켜니 아침부터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500cc 맥주를 4잔 마셨다고 머리가 아픈 적은 없는데 빠르게 마신 것이 문제일까, 아니면 안주가 많이 없던 것이 문제일까. 오늘은 한국에서 친구가 오는 날이었는데 다행히도 오후 도착이었다. 오전 도착이었다면 나는 제정신으로 이 친구를 맞이할 수 없었을 거다.


 적당한 무계획을 빙자한 완전한 무계획으로 몽골에 도착한 나는 안나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일주일 정도 시간이 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부터 비었던 것은 아니고 안나 부모님의 일정이 바뀌면서 어쩌다 보니 생긴 공간이었는데, 나는 몽골에 가고 싶다고 했던 친구들에게 놀러 오면 놀아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내가 그 일주일은 온전히 재밌고 신나게 채워줄 수 있는 보장은 없다는 것도. 그렇게 해서 오게 된 이가 바로 과후배이자 만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김지헌군 되시겠다. 안 지 2주밖에 되지 않은 선배를 믿고 몽골로 날아온 김지헌군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가서 숙소에 하루 종일 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나를 믿고 한국에서 날아온 친구를 숙소에 처박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나는 내 여행 계획을 짤 때도 그리 잘 굴리지 않았던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며 어떻게 하면 일주일을 그나마 만족스럽게 채울 수 있을지 생각했다.


 뭐, 이 아주 멋진 계획은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고. 이 친구들이 오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건 바로 카페에서 글쓰기. 타지에서 영화 보기를 이은 타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글쓰기랄까. 그렇다고 내가 걸어서 울란바토르 중앙까지 가기엔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니 집 주변의 카페를 가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 이 동네 정말 미치겠다. 위치를 도저히 찾을 수 없어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서 간신히 도착한 카페는 공사중이었고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갔던 두 번째 카페는 문을 닫았으며 세 번째로 희망을 가지고 간 카페는 아예 사라지셨다. 심지어 가벼운 마음으로 간 거라 두 손에 태블릿과 키보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땡볕에 노출된 나의 인내심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사건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웬만하면 내 두 손에 아무것도 든 것이 없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한단 말이다.


분해되고 사라진 카페들


 결국 정말 최후의 최후의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었던 복합 쇼핑몰에 있는 버블티 카페, The Alley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버블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가장 작은 사이즈의 밀크티를 시켰다. 그런데 웬걸, 이 카페에는 와이파이가 없단다. 와이파이가 없는 카페라니. 정말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나는 이곳에 강의를 듣거나 회의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글을 쓰러 온 것이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황당한 일들도 적고 여태까지 썼던 비용을 정리하고 쓰고 싶은 기분이 드는 감정들을 정돈되지 않은 문체로 열심히 적고 있자니, 드디어 두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 도착했어. 어디야?"

 "나 4시쯤에 도착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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