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2018)
돌아갈 곳 하나 없던 적이 있어 봤는가. 비 오는 날 닫힌 셔터에 붙어 정수리만 보존했던 날이나, 옷 한 벌 얻지 못하고 현관문 밖으로 쫓겨난 어린 날, 혹은 월세를 내지 못한 집에 누워 있던 날들. 집이 집 같지 않아 늦은 시간임에도 근처만 서성이던 시간. 우리는 살아가며 꽤 많이 유기된다. 물리적으로 공간을 잃었을 때뿐만 아니라 내 집이 집이 아닌 듯한 소외감을 가진 채 억지로 체류하던 순간들도 포함해서. 그럴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혹은 어디로 떠날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난 아직도 생각해 본다. 집에서 쫓겨난 어린 날에, 정말 현관 앞을 떠나 어디로든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전부 대담했다면 ‘속옷만 입고 쫓겨난 아이들의 쉼터’같은 장소가 동네마다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어른들은 그 쉼터에서 상주하며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보호해 줬을지도 모른다. 그런 어른들은 얼핏 유치해 보이지만 잔뜩 혼난 채 겁먹고 쫓겨난 아이들에게는 순간 진짜 부모처럼 보일 테다.
우리 이 보호소를 조금 더 가족처럼 만들어보자. 어른들이 쫓겨난 아이들을 데려오고, 잘 입히고 먹인 다음에 왜 쫓겨났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곤 조금 더 나아가서 아이가 괜찮아질 때까지 함께 살아준다. 마치 린(사사키 미유)을 주워 온 오사무(릴리 프랭키)처럼.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무작정 린을 데려온 오사무에게 아이를 다시 본인의 집으로 데려다 놓으라 한다. 지금은 너무 추우니 아침에 데려다주겠다는 오사무의 대답에 노부요는 이렇게 반박한다. “안 돼! 여기가 보호소야?”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오사무는 납치범이다(자기가 속옷만 입힌 채 내쫓은 아이를 다시 찾고 있는 부모도 똑같이 생각할 것 같다). 동시에 린은 가정폭력의 피해자다. 게다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고 데려와진 아이를 보았을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오사무가 린을 구한 거야!
그날 밤, 린의 가정을 목도해버린 노부요마저 보호소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리고 돌아온 린을 누구도 내치지 않는다. 이 가정은 모두 같은 처지니까.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학대당한 이 다섯은 가정의 의무인 양육과 보호에서 버려진 자들이다. 그렇기에 노부요는 린을 두고 올 수가 없었다. 이 가족은 버려진 사람들이 모여 스스로 꾸린 보호소니까. 결핍이 발생한 이유는 결핍을 겪은 자들만이 알기에 모인 이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찾아 보호하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가계도는 일방적인 가지치기 모양임과 동시에 원형으로 이어진 보호적 모양이기도 하다.
식사 장면에 주목해 보자.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틈틈이 보여주는 식사들은 식구食口라는 단어의 은유다. 영화에서 다섯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장면은 흔하다. 때마다 식탁에 앉은 구성원들은 다를지라도 린을 데려온 날, 아키(마츠오카 마유)와 하츠에(키키 키린)의 나들이, 비 오는 날의 노부요와 오사무, 눈 오는 날 맨션에서의 오사무와 쇼타(죠 카이리), 외에도 간간이 보이는 식사 장면들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런 장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반면 기억에 불편하게 남은 식사들이 있다. 유사 식사와 거짓말 식사다.
유사 식사. 하츠에가 아키의 집에서 디저트를 먹는다. 아키는 하츠에의 전남편의 손녀이므로 엄밀히 따지면 남이지만, 그녀는 전남편의 제를 올린다는 명분을 이용해 주기적으로 아키의 부모네 집으로 가 용돈을 받아낸다. 그때 아들 부부 내외가 차와 케이크를 내어놓는다. 차와 케이크는 대접의 대명사다. 그 배경이 일본이라면 더욱더. 따라서 장면이 진행되는 내내 시청자는 불편해진다. 먹던 케이크도 두고 나갔으면 하는 만큼. 그러나 하츠에는 당당히 먹고 마신다. 자신이 이 집에 있음이 당연하다는 듯. 한쪽만 당당하고 반대쪽은 어색한 이 상황이 불편함을 가중시킨다. 우린 이 장면을 식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섭취의 행위만 있을 뿐이다.
거짓말 식사. 린의 친부모가 기자회견을 할 때, 린의 부모는 국민들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 “쥬리 양은 무엇을 먹었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가장 좋아하는 오므라이스’를 직접 만들어 먹였다 한다. 여기서 거짓말은 린의 식사 여부가 아니다. 린이 식사를 하는 장면은 영화에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이 식사의 거짓말은 린이 좋아하는 음식이 오므라이스가 아닌 ‘망개떡’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기억하는 시청자는 1층인 집의 현관에 붙어 기자회견을 들었을 아이의 마음만 짐작해 볼 뿐이다.
한 지붕 아래의 안정적인 보호는 식사의 분위기에서 드러난다. 있었는지도 없었는지도 무얼 먹었는지도 자세히 기억나지 않을 만큼 자연스레 지나간 수많은 장면과 대비된 이 두 장면은 하츠에와 린이 자신의 혈육들에게서 물리적인 보호를 받지 못했음을 말한다. 인정받지 못한 이방인들이다. 영화에서는 이 이방인들이 몇 번이고 모여 한 식탁에 둘러 앉는다. 같은 우동에 물을 올리고, 고로케는 국물에 적셔 먹는 게 맛있음을 알려준다. 자신의 떡을 혈육도 아닌 이에게 양보하며, 상대는 타인의 침이 묻은 수저로 받은 떡을 먹는다. 면발을 삼키지도 않았는데 붙어먹겠다고 입을 맞추기도 한다. 이들은 먹으면서 끊임없이 대화도 나눈다. 이들의 제대로 된 식사는 하츠에의 집에 와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들은 사회에 들키면 안 되는 존재기에 집주인 하츠에를 제외한 다섯은 전부 가명을 사용하게 된다. 원형의 가계도는 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발생한다. 노부요와 오사무의 가명에는 하츠에의 성이 붙는다. 이어서 노부요와 오사무는 아이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준다. 오사무는 본명을 쇼타에게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아키는 자신의 동생 이름인 사야카를 가명으로 사용한다. 이곳에서 이름 짓기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유년기에게 둘러주는 일종의 보호막이다. 따라서 이 가정의 어른―아이의 관계는 단순한 부모자식이나 조모와 손녀가 아닌 현재와 과거의 투영에 어울린다.
왜 이름을 새로 지어준 건지, 오사무가 왜 하필 자신의 이름을 주었는지는 노부요와 오사무의 가정사를 살펴보면 된다. 술집에서 일하던 노부요는 전남편의 가정폭력 피해자다. 영화 후반부 경찰과의 진술에서 드러나는바, 노부요와 오사무는 전남편이 자신들을 죽이려 하자 반격하여 그를 죽였고, 법원도 이를 정당방위로 인정했다. 이들에게는 가정폭력에 따른 버려짐이 있다. 이 과거를 감안하고 아이들의 이름을 다시 보자.
(어른)쇼타는 (아이)쇼타에게 자신의 이름을 준다. 그의 본명은 가족이 깨진 후에야 드러난다. 그리고 아이의 본명은 끝까지 드러나지 않은 채, 영화의 결말에서도 쇼타는 쇼타로 살아가길 택한다. 과거가 도려내진 것이다. 쇼타의 과거가 도려내졌다면, 오사무의 과거는 어디로 갔을까. 그건 이름과 함께 쇼타에게 계승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넘겨주고, 자신이 이름 지은 아이에게 자신이 가르칠 수 있는 최대를 가르친다. 비록 그것이 도둑질일지라도. 이는 쇼타라는 한 아이를 키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미 사라진 자신의 유년기를 새로이 이어 나가는 일종의 계승이다. 오사무의 과거에 대한 정보가 노부요의 손님이었다는 사실뿐임도, 쇼타의 존재로 인해 더 이상 밝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노부요의 과거 정보가 적음 또한 린이 과거의 노부요를 계승했기 때문이다(찰나에 만난 린이 과거의 노부요가 될 자격은 둘의 동일한 흉터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 관계도가 어떻게 일방적 계승이 아닌 쌍방이 되고 원형의 모양을 가지는가. 그건 단순히 아이들이 린과 쇼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어서다. 부부는 자신들의 과거가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아이들과 그 이름으로 느꼈을 것이다. 린의 옷을 태우기 전, 노부요는 아이를 자신의 품에 안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거, 태울 거야.” 이는 단순히 ‘같이 불장난하자’나 ‘증거 인멸을 위해 네 옷을 태울 거야’ 따위의 뜻이 아니다. 자신과 린의 과거를 소멸하고자 하는 의지다. 이어서 노부요는 자신과 같은 과거를 가진 아이를 품에 안고 타들어 가는 허물을 바라보며 말한다. 맞고 자란 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폭력은 사랑의 표현도 아니라고. 정말 사랑하는 건 이런 거라고. 또한 노부요와 린의 뒤로 모두가 이를 바라본다. 전부 가정에서 물리/정신적 폭력을 겪고 버려진 이들이다. 노부요의 말은 자신의 과거를 다시 한번 끝마치는 말이자, 동시에 린이라는 새로운 과거를 지켜내는 방패이며, 뒤의 동지들에게 들려주는 위로다.
아키는 퇴폐업소에서 일하며 동생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한다. 자신의 손님인 4번과의 대화에서는, 자신도 스스로를 주먹으로 때린 적이 있다고 했다(이 말이 진실임은 취조 장면에서 등장한 아키의 손에 생긴 상처로 확증된다). 이후 하츠에가 아키의 집에 방문했을 때, 부모는 아키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숨겼다. 이때 아키의 졸업사진이 등장한다. 흔히 접하는 서브컬처로만 보아도 일본의 입학식과 개학식에서는 부모님과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아키는 좋지 못한 표정으로 졸업 증서를 든 채 혼자 사진을 찍었다. 반면 그 앞의 액자에는 진짜 사야카의 웃는 얼굴이 데이지꽃 무늬 액자에 걸려 있고, 왼쪽에도 액자가 있는 걸 보아 아키의 졸업사진은 가장 구석의 위치다. 액자 클로즈업 직전에 나타난 사야카와 부모의 대화 내용과 그녀가 들고 있는 악기로 보았을 때, 아키는 가정 내에서 차별당했을 것이라 유추된다. 이 차별로 인해 자신을 스스로 주먹으로 때리는 자해를 하고, 그를 알아챈 할머니가 아키를 데리고 나온 듯하다. 아키에게는 할머니와의 동거가 가정에서의 탈출(하츠에와 살 때에는 손에 상처가 없었다)이었다. 탈출에 성공한 아키는 사야카라는 가명과 사야카와 비슷한 치장을 하여 자신에게 사야카를 투영한다. 그 모습으로 생활도 하고 퇴폐업소에서 일도 한다. 사야카라는 가명은 가정에 대한 일종의 복수임과 동시에 차별당했던 대상으로 살아보는 일종의 대리만족으로, 아키 스스로에게 주는 보호막이었다.
가정에서 유기된 쇼타를 데려온 오사무,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린을 데려온 노부요, 자신과 같이 버림(전남편의 바람 또한 일종의 버림이니)받은 이들을 데려와 가족 삼은 하츠에. 순탄하고 안전해 보이던 이들의 보호는 끝내 아이러니를 불러온다. 이쯤에서 하나를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보호소의 목적이 무엇인가. 보호소의 첫 번째 목적은 보호, 두 번째 목적은 사회로의 복귀다. 하츠에와 어른들은 보호의 울타리는 이루었지만, 사회로 나갈 수 있는 문을 만들지 않았다. 사실 문을 설치하지 못했음이 맞겠다. 이들에게는 사회에서 받아 굳은 상처가 만만찮다.
여기서 가족의 가계도가 역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사회로 나가기 시작했다. 돈이라는 한계에 부딪힌 어른들에게 의문과 회의를 가지기 시작한 쇼타는 린을 지키기 위해 ‘스위미의 눈’이 된다. 보호로서의 눈이 노부요라면 사회로 나가는 눈은 쇼타다. 린의 도둑질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이 이목을 끌어 도망치다가 고가도로에서 스스로 추락한다. 이 때문에 가족은 의도치 않게 사회로 방출된다. 사회적인 시선에서 이들은 비도덕적 집단(유괴, 납치, 가출, 도둑질, 시체유기 등)이므로 질타를 받는다. 그러나 병상에 누운 쇼타는 형사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린 또한 마찬가지로 형사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함께 갔던 바다여행만 묵묵히 그릴 뿐이었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있는 아키도 할머니가 자신을 돈 때문에 데리고 있었냐는 질문과 함께 당혹감에 빠지더니 결국 시체의 위치를 알려준다. 영화의 전개로서는 결말이자 가족의 붕괴로 보이지만 아이들의 관점에서는 성장이다. 자신의 길을 찾아 원형으로 닫힌 보호를 뚫고 나간 것이다.
결국 린이 돌아간 곳은 친부모의 집이다. 그 집에서 어느 가족에게 배운 노래를 부르며 쇼타와 함께 봤던 구슬놀이를 한다. 새 옷을 사준다는 엄마에게 싫다고 하고,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 비위를 맞춘다며 사과하지 않는다. 린은 이제 배운 것이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그러나 사회적으로 떳떳하게 살아갈 곳은 어느 가족의 위장 거처가 아닌 쥬리의 법적인 집이다. 쇼타 또한 사회적으로 올바른 보호소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계속 오사무를 찾아가고, 마지막에는 들리지 않게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를 부모로 인정한다. 그러니 이들이 맞다 틀렸다 이전으로 우리가 다시 한번 해볼 질문이 있다. 영화의 초반에 던져진 노부요의 질문이다. “안 돼! 여기가 보호소야?” 이 말을 다시 하자면, 보호소는 대체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