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된 감정의 파도

이성복 시인의 「바다」

by 이영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이성복, 「바다」



바다에 가면 관례처럼 하는 일이 있다. 매번 파도가 치는 영상을 30초 남짓 촬영한다. 영상을 수차례 열어본 적은 손에 꼽지만 꼭 시간을 내 찍어간다. 다시는 이 바다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기 때문이다. 바다를 찍는 동안에는 사람이 가장 적은 위치로 간다. 그리곤 파도 소리만 담아온다. 나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부동의 자세를 유지한다. 파도 다큐멘터리라도 찍는 것처럼. 그 순간에는 파도만이 내게 말 걸며 다가온다. 젖은 모래의 끄트머리에 서 있으면 파도 끝이 발치에 닿으려다가 물러간다. 어떤 파도는 닿지도 못할 것처럼 내게 오면서 기어코 신발을 적시고 간다. 불쑥 발목을 잡고 떠난 파도는 물러났다가 다시 인사하러 쫓아온다. 삶에는 이렇게 나를 따라다니는 것들이 있다. 갑자기 고개를 내밀더니 말 없이 사라지는, 또 소멸한 것은 아니어서 살다 보면 다시 나타나는 것들. 가령 서러움 같은 거 말이다.

‘서러움’이 ‘나’에게 말을 건다. 무슨 말을 건넸는지는 모르겠다만, 서러움은 내심 대답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화자가 대답이 없자 서러움은 그를 따라간다. 그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지만 달아나지도 않는다. 그렇게 둘은 “먼 길”을 가기 시작한다. 왜 화자는 서러움이 거는 말은 무시했으면서 따라오는 건 쫓아내지 않았을까. 접촉하는 건 안 되지만 보이지 않게 뒤따라오는 건 괜찮다는 뜻일까. 아무튼 서러움과 그는 “우리”가 되어 오래 함께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화자가 서러움과 함께가 된 것은 원해서였을까?

“먼 길”을 가던 이들에게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수많은 소나무로 인해 그의 눈앞이 가려진다. 거대한 숲을 만난 그는 “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간다. 이제 알 수 있다. 화자가 서러움과 함께한 이유는 서러움이 좋아서도 아니고, 그를 무시해서도 아닌, 참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상황을 다시 보자면 화자는 뒤를 따라다니던 서러움을 참고 또 참다가 마침내 소나무들을 마주한 것이다. 소나무는 뭘까. 사시사철 지지 않고, 그 이파리는 잘못 만지면 찔린다. 길 가다가 솔방울을 맞으면 그것도 꽤 아팠던 기억이 있다. 찌르는 잎이 수천, 수만 가닥 달려 있고 수류탄 같은 것들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숲. 인생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일들이나 삶 그 자체라고 봐도 좋겠다. 중요한 건 소나무 숲이 화자의 “눈앞을 가”렸다는 사실이다. 서러움이 쫓아오지만 발생하는 일들은 비켜주지 않는다. 내부를 알 수 없는 삶 앞에 그가 서 있다. 뒤로는 서러움, 앞으로는 속이 보이지 않는 삶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러움이 숨”었다. 서러움은 보이지 않는다. 서러움을 느낄 새 없을 만큼 혼잡했던 것일까. 아무튼 자신을 맞이하는 빽빽한 사건들 속에서 화자는 한순간만큼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서러움은 있었다. 나아가던 순간, 그는 보고야 말았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시의 제목처럼 파도 같은 모양이다. 서러움이 숨고, 화자가 나아가는 찰나, 그것이 다시 달려온다.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라는 반복성 구조에서 그의 당황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서러움은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 행의 손을 흔드는 서러움에게서는 반가움까지 느껴진다. 그 때문에 왠지 이 파도에게서는 버려진 삽살개가 생각난다. 자랄 대로 죄 자란 털이 꼬질거리고, 털이 흔들릴 때에야 그 사이로 겨우 보이는 눈과 코, 튀기는 침, 거친 호흡, 비린 개 냄새. 화자는 여태 서러움을 유기한 것이다. 여기서 3연을 다시 보자. “소나무 숲가”에서 “서러움”이 “숨”었다. 과연 숨었을까? 화자가 서 있는 곳은 고작 소나무 ‘숲가’다. 아직 숲의 중앙이 아니다. 더군다나 소나무 숲은 듬성듬성하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진데다가 “흰 무거품 입에” 문 서러움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화자는 여전히 보이는 서러움을 외면한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 속에서 더 이상 서러워할 새 따위 없다는 마음이었겠지. 이 유기는 처음부터 시작되었다. 서러움이 말을 걸지만 아무 대답도 않았다. 서러움이 따라오지만 맞이하지 않고 무시하며 갔다. 서러움은 충성심 강한 유기견의 성질을 띤다. 그가 아무리 서러움을 버리고 숲으로 숨어들어도 그를 따라간다.

더불어 서러움의 본질은 파도다. 살아가며 쌓인 수많은 서러움은 어떻게 되는가? 중첩된 서러움은 언젠가 터져버린다. 그렇기에 서러움의 등에는 “짙푸른 물굽이”가 있다. 끊임없이 쏠려오고 밀려오는 물살이 있다. 서러움은 늘 원치 않은 곳으로 새고, 까딱하면 건강하게 지나가지 못할 감정이다. 서러움은 내·외부적 요인이 갑작스레 다가오면서 발생한다. 다가오는 순간은 피할 수도 없다. 늘 있었던 일이 한순간 서럽게 다가올 수도 있고, 친밀한 관계에서도 말 한 마디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다. 이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무엇인가. ‘이 사람(혹은 이 상황)은 나한테 왜 이러지?’다. 따라서 서러움의 등에는 올곧은 물길이 아닌 구불구불하게 휜 길이 생긴다.

거친 물살에 휩쓸리는 서러움은 이 땅 저 땅을 파헤치고는 화자에게 다가온다. 그 물살의 끝에는 “흰 물거품”이 있다. 물거품은 파도처럼 거세게 몰아치는 물에만 생긴다. 그런 서러움은 이제 달려오는 유기견을 넘어 화자를 덮치려 한다. 파도는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끊임없이 생겨나니까. 더불어 파도는 거대한 물웅덩이(즉, 지구의 반 이상인 바다)에서 발생한다. 외면해도 보이고, 들리고, 비대하고, 결국 하나로 모이는 것. 깊이를 알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곳에서.

달려온 서러움에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장면만 보아서는 침몰되어 휩쓸렸다고 짐작해 본다. 배경이 소나무 숲인 것을 보아 나무를 잡고 버텼을 수도, 나무까지 뿌리째 뽑혀 쓸려나갔을 수도 있다. 견딜 수 없는 감정에 매몰되어 일상이 무너지는 건 생각보다 비일비재하니까. 어찌 되었든 화자는 거대한 파도를 마주하는 순간에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참으면 될 줄 알았는데. 커다란 일들을 해치우면서 살아가다 보면 참아질 줄 알았는데. 썰물이 나갔다는 건 곧 밀물이 온다는 뜻이다. 내부적 요인이든 외부적 요인이든 인생에서 불쑥 솟아나는 서러움은 막을 수 없다. 이 시도 서러움에 관해 이야기하기만 할 뿐, 이후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러움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기어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낸다면 썰물이 나갔을 때 밀물이 오는 것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높은 곳으로 올라가거나, 서둘러 배 한 척을 구해 타는 것뿐이다. 하지만 피하지 못해 휩쓸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파도가 자연재해가 되는 건 한순간이니까. 서러움이 우리를 너무 반가워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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